[스크랩] 일본속의 한국 문화를 찾아서(셋째날)
셋째날, 1월 23일(일)
오늘은 큐슈의 서쪽 항구도시인 나가사키를 가는 날이다.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나가사키행 급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약 2시간이 걸리는 먼 곳이었다. 기차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2010년 일본 드라마중에서 최고의 드라마는 역시 NHK에서 방영한 '료마[龍馬]'일 것이다. 그런데 그 료마가 활동한 주요 도시가 바로 나가사키이다. 그래서 나가사키에 가면 료마와 관련된 많은 유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에 오기전 료마 전편(50편)을 모두 보고온 터라 그가 활동한 지역이 사뭇 궁굼했다.
나가사키 역에 내리자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시설물이 들어서 있었다. 관광안내소 바로 옆에 '료마관광안내소'가 별도로 세워진 것이다. 아~ 직감했다. 오늘 일정은 료마와 함께 시작해서 료마로 끝날 것이구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예상은 적중했다. 가는 곳마다 료마 사진이 걸려 있었으며 료마관련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고, 료마 관련 유적지를 보러온 일본 국내관광객도 무지하게 많았다. 그래서 우리 일행도 그 행로에 편승하였다.
먼저 가메야마사중[龜山社中]을 찾았다.
2010년 일본 최고 흥행 드라마는 '료마'였다. 일본 NHK에서 방영한 대하역사드라마로 1년간 방영되었는데 그 여파는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중으로 올라가는 골목골목에 안내판과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으며 자중에는 이미 와서 대기하고 있는 일본 국내 관광객들이 줄지어 있었다. 정선생님의 시대배경과 사카모토 료마에 대한 설명을 듣고 료마 부츠 기념조형물에서 사진을 찍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도사(土佐 : 지금의 고치현)번의 하급 무사 출신으로 19세에 에도(지금의 도쿄)로 유학을 떠나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 지바 도장에서 검술을 배우면서, 한편 에도의 존왕양이론자들과 사귀었다. 그때 미국의 침략을 직접 목격하였고, 외국 세력의 침략을 막기 위한 일본의 대책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당시 젊은이들과 비슷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검술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지만 칼만으로는 서양세력과 맞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포술과 항해술을 배우고, 뜻이 맞는 친구들과 가메야마 사추(龜山社中, 구산사중)를 조직하여 무역과 해외 개척을 목표로 매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나가사키 가메야마사추[龜山社中]는 훗날 가이엔타이(海援隊, 해원대)를 거쳐 미쓰비시 그룹으로 발전한다.
신국가 건설을 위해 매진하던 료마는 1865년 1월 21일, 당시 막부 타도를 공공연히 외치던 지방정부로는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있었다. 문제는 이 두 번의 사이가 지독히도 안 좋았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막부의 대군이 조슈 번을 공격하기 위해 쳐들오고 있었다. 조슈 번이 전쟁에서 지면 막부를 타도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한낱 꿈으로 사라질 급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조슈 번은 공식적으로 "반란군" 으로 규정된 판이라 해외와 어떤 거래도 할 수 없었고, 당연히 막부와 싸우기 위한 총기도 구입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신국가 건설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상황에 놓였다. 이 상황을 반전시킨 것이 료마였다. 료마는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주요 인물들을 설득하여 서로 동맹을 맺게 하고, 조슈 번이 막부군과 싸울 때 쓰기 위한 총기를 사쓰마 번이 대신 구매해 주도록 주선한다. 이른바 삿쵸(薩長)동맹이다. 조슈 번은 료마의 중계 덕분에 막부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고, 결국 사쓰마와 조슈, 도사는 이후 힘을 합쳐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게 된다. 이 때 신정부의 정부 구조와 정치 방향을 제시한 것도 사카모토 료마다. 공식 직함 하나 없는 낭인에 불과한 그가 "근대 일본을 만들어낸 사나이" 로 불리는 이유다.
다시 데지마(出島)로 향했다.
데지마는 1636년 바다를 메꾸어 만든 부채꼴 모양의 인공섬으로 당시 포르투갈 사람들이 일본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포르투갈 사람들을 격리시켜 놓은 곳이다. 데지마는 동서 길이가 약 210미터, 남북은 약 60미터, 넓이가 약 4,000평 정도였는데, 메이지 시대 때 주변이 전부 메워지는 바람에 현재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으며 단지 미니어쳐로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1639년 막부의 쇄국정치로 포르투갈인들이 추방당하자 데지마는 공터로 변해 남만 무역으로 번성했던 그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거리도 초라해져 갔다. 이 때문에 막부는 히라도[平戶]에 있던 오란다상관을 이곳으로 옮겨 200년 뒤 개국할 때까지 오란다(네덜란드)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게 된다.
데지마안 전시관에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문양인 VOC 글자가 새겨진 도자기를 볼 수 있다.
점심때가 되었다. 기왕에 나가사키에 왔으니 이곳의 명물인 참퐁을 먹어야겠다.
데지마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신치추카가이[新地中華街]가 있다. 차이나타운이다. 이곳은 메이지유신이후 나가사키에 체재하고 있던 중국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조성되었다. 그런데 오우라성당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시카이로[四海樓]라고 하는 중국요리집이 있다. 이 집은 나가사키를 대표하는 중국요리집으로 1899년 중국 푸젠성에서 건너온 초대 사장이 개발한 국수가 바로 '나가사키 참퐁'의 기원이 된다. 당시 그는 이곳에서 배를 곯으며 공부하고 있던 중국 유학생들을 위해 여러가지 야채를 넣어 국수를 만들었는데 그 요리가 바로 지금 나가사키를 대표하는 참퐁이 되었다. 짬뽕이라고 하여 한국식 짬뽕을 생각하면 크게 낭패를 본다. 맛이 심심하다.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단무지, 춘장, 양파는 없다. 정말 심심하다.
점심을 먹고 나서 일행은 오우라 천주당으로 향했다.
이곳은 1859년 개항 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창건한 카톨릭 성당으로 1864년 푸치쟝 신부때 완성되었다. 이 성당은 1596년 순교한 26성인을 추모하는 의미로 니시자카 언덕을 향해 세워졌는데, 정식 명칭은 '일본 26성인순교자 천주당'이다. 당시 나가사키 주민들한테는 '프랑스 절'이라 불렸는데 현조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천주당이며 서양 건축물로는 유일한 국보이다. 마침 오늘이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성당 내부에 장식되어 있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화려한 빛을 발하고 있어 중후한 멋을 보여 주었다.
1591년 포르투갈 상선의 내항이후 서양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나가사키는 쇄국정치 때에도 막부의 유일한 무역항으로 발전을 계속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이 그로바엔에는 아름다운 양관(洋館)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이국적인 멋을 간직한 곳이다.
그로버엔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는데 박선생님은 경로우대를 받았고, 동준이는 학생 할인을 받았다. 외국에서도 우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며 모두들 길고 긴 에스컬에리터로 이동을 하였다.
이 그로버엔은 1974년 나가사키시가 7억 엔을 들여 조성한 정원으로 그로버는 글로버(Glover)의 일본식 발음이다. 정원안에는 글로버하우스 등 모두 8채의 양관 건물이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구 미츠비시 도크하우스에서 나가사키 시내를 바라보는 조망이 아주 좋다. 한 눈에 시내가 모두 들어온다. 그리고 정면으로 미쓰비시 조선소가 들어온다.
이 건물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바로 글로버 주택이다. 1863년 세워진 건물로 일본 최고의 목조 서양풍 건축물이다. 정면에 현관을 두지 않았다. 건물 안에는 당시에 사용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글로버의 일본인 아내 쓰루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이 그로버 주택은 사카모토 료마와도 관련이 있다. 료마는 서양 무기를 사기 위해 이곳 글로버 저택을 찿았고, 당시 막부 말기의 격동하는 시대에 뜻있는 많은 지사들을 숨겨주던 곳이었으며, 이곳을 통해 영국으로 많은 일본의 젊은이들이 유학을 떠났다. 그래서 훗날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한다. 그는 일본에서 평생을 보냈으며 1911년 73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내 쓰루와 함게 살았다.
언덕을 내려가다 보면 낮익은 동상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미우라 다마키의 동상이다. 세계 3대 오페라 손꼽히는 나가사키를 무대로 한 가극 마담 버터플라이(나비부인)의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의 동상과 마담 버터플라이를 연기해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미우라 다마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한 참을 내려가다가 이 공원에 바닥돌 중에서 특이하게 하트 모양을 하고 있는 돌이 있다. 나가사키의 여학생들이 이 곳을 찾아 하트에 손을 대면 사랑이 이루어 진다고 하여 많은 여학생들이 찾는 곳이다. 마침 한 무리의 여학생이 찾아와 '하또'를 외치며 반가워한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기차를 타기위해 언덕을 내려오는데 나가사키의 또하나 명물인 카스테라 가게들이 양쪽으로 줄지어 있다. 점원들이 나와서 카스테라를 팔려고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낯익은 한글 서비스. '맛있어요' 하더니 잠시후에 '레알 맛있어요'를 연거푸 외친다. 모두들 그 가게로 들어가 카스테라를 고른다. 물건을 우리 일행이 이거 얼마간 보관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서로 얘기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2주간 보관할 수 있어요'라고 외친다. 그리고 '상온에서 2주간 보관할 수 있어요'를 외친다. 그저 놀라 웃기만 하였다.
다시 나가사키에서 하카타로 돌아왔다. 오늘은 기차안에서 긴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모두들 피곤해 하는 기색은 안보인다. 그래서 하카타 역에 내려서 캐널시티로 향했다. 캐널시티는 하카타시내에 있는 먹고, 마시고, 보고, 사고, 자는 곳으로 복합공간이다. 이곳의 5층에 라멘 스타디움이 있다. 일본 최고의 라면집 맛을 모아 놓은 곳이다. 한 참을 둘러보고 있는데 '혹시 한국분 아니세요' 잉? 여기서도 한국어를? 식당 종업원이 마침 조선족이었다. 유창한 한국어에 그만 그 집으로 들어가 돼지 뼈 국물에 우려낸 라면을 먹었다. 한 그릇을 뚝딱 비운 동준이를 모두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며 맛있니? 라고 묻자, 동준이는 '네 맛있어요 그런데 또 먹으라고 하면 못 먹겠어요'라고 한다. 느끼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캐널시티를 둘러 보려고 내려 왔는데 아뿔사, 중앙분수대가 공사중이다. 평소 같으면 수변무대에 화려한 조명과 공연으로 가득한 곳인데...... 이번 여행은 왜이리도 공사중이 많을까....모지항의 블루윙이 그랬고, 오우라 천주당 옆 자료관이 공사중이었고, 이곳 마저도. 캐널시티를 나와 한국의 포장마차가 있다는 강변 옆으로 갔으나 예전만 못하였다.
숙소로 돌아와 하루를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