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준의 산수고보다 약 100년 후인 1861년에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 청구도, 동여도 등은 국보처럼 귀중하게 보존되어 있고, 김정호의 영정이나 동상, 기념표지석도 여러 곳에 세워져 전 국민적으로 선양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토지리서를 집대성하고 백두대간의 논리를 정립한 신경준의 영정이나 동상은 찾아볼 수 없어 매우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 없다. 단지 신경준은 팔도지도와 동국여지도를 남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신경준의 출생지인 전북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에는 놀랍게도 신경준의 고지도가 남아 있었으며, 그 지도는 신경준의 8대 직계후손 신장호씨(60)가 보관하고 있었다. 지난해 12월20일 필자는 오랜 숙원이었던 신경준의 생가유적을 답사하기 위하여 고추장으로 유명한 순창을 찾았다. 그리고 신경준의 후손 신장호씨를 만나 신경준의 고지도를 확인한 후 한 지리학도로서 심장이 멈출 듯한 감격을 맛보았다.
이 지도는 이미 전북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며, 순창읍 가남리 그의 유적지 안내판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고지도는 신경준(1712-1782)이 군사 목적에서 작성한 것으로, 각각의 명칭은 북방강역도(北方江域圖·필자주=疆域圖의 오기)와 강화 이북의 해역도이다. 신경준은 조선 영·정조(1724-1800) 때의 실학자로 귀래정 신말주의 후손이다. 두 지도 중 북방강역도는 백두산에서부터 압록강·두만강까지의 거리와 지명, 동네이름 등을 적은 것이며, 강화 이북의 해역도는 강화도로부터 압록강 하구 사이에 있는 각 섬과 암초, 해안의 굴곡 등을 표시한 것이다. 둘 다 순 한지를 이용하였으며, 크기는 강역도가 73.5cm x 11.1cm로 창호지 한 장 정도이다. 해역도는 272cm x 83cm로 가로로 세 폭의 종이를 이은 것이다.'
조선 영조(1770)는 ‘문헌비고(文獻備考)가 이루어진 것은 신경준의 강역지(疆域志)에 의거한 것이라 하여 특별히 (공로를 치하하여)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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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준이 대동여지도보다 약 100년 앞서 제작한 북방강역도 상의 백두산 부근. 백두대간의 머리부분인 소백산, 허향령, 보다회산이 보이며, 우측에 백두산 정계비가 보인다. |
지세 파악과 지리 궁구의 근본 백두대간
산줄기를 알기 쉽게 만든 책이 산경(山經)이고, 물줄기를 정리한 책이 수경(水經)이다. 우리 국토의 산경은 조선 영조 때 신경준이 영조 45년(1769)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산경표이다. 수경은 조선 말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1814년 강진에서 쓴 대동수경(大東水經)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들 산경과 수경을 합치면 나라 땅의 산줄기와 물줄기가 일목요연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산경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된 큰 줄기(白頭大幹)를 중심으로 많은 가지(正脈)들이 뻗어 있는 나무 모양과 같다. 산줄기와 물줄기를 살펴보면 서로 얽히고 설켜 있으나 결코 물줄기는 산줄기를 넘지 않으며 산줄기도 물줄기를 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경준은 43세 때인 영조 30년에 벼슬길에 올라 승문원 사간원 사헌부 등에서 일하다 서산군수 장연현감을 지내고 58세 때 종부시정(宗簿侍正)을 끝으로 고향인 전라도 순창으로 낙향한다. 이 무렵 영의정이던 홍봉한은 그를 영조에게 천거해서 비국랑(備局郞) 직책으로 다시 관직에 오른다.
영조는 신경준이 지은 강계지를 보고 여지편람(與地便覽)의 감수를 맡겨 편찬하도록 한다. 여지편람은 말 그대로 땅 모습을 보기 쉽도록 만든 책인데, 바로 이 책의 일부가 산경표이다(한중기 글). 여지편람은 모두 2권 2책(乾冊·坤冊)으로 구성돼 있는데, 건책이 바로 산경표이며, 곤책은 거경정리표(距京程里表)이다.
현재 남아있는 산경표는 규장각의 해동도리보(海東道里譜) 중의 산경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여지편람 중의 산경표, 영인본으로 조선광문회가 1913년 간행한 산경표 등 모두 세 가지다. 산경표는 자연 지명인 산이름과 고개이름 등을 표기하고, 기술은 족보기술법에 따르고 있는데, 등장하는 자연지명은 총 1,650개이며, 이 가운데 산이름과 고개이름이 1,500개 정도이다.
산경표는 신경준의 산수고와 전혀 다른 책?
‘산경표는 신경준의 산수고와는 체제, 내용, 양식이 전혀 다른 책‘이라고 성신여대 양보경 교수는 ‘여암 신경준의 지리사상’ 논문에 다음과 같이 발표한 바 있다.
‘산경표를 신경준의 작으로 단정하고 있으나 신경준이 지은 책은 아니다. 이의 근거로 일본 정가당문고(靜嘉堂文庫)에 전하고 있는 같은 제목의 여지편람(輿地便覽)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여지편람이 영조가 동국문헌비고 편찬의 과정에서 언급한 여지편람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점, 현전하는 산경표에는 19세기 초에 변화된 지명 등이 기재된 점, 산경표에 문헌비고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저자를 신경준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산경표가 신경준이 편찬한 산수고와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임은 분명하다. 신경준의 산수고는 우리나라 전국의 산과 강을 거시적인 안목에서 조망하여 전체적인 체계를 파악하고 촌락과 도시가 위치한 지역을 산과 강의 측면에서 파악한 책이다. 18세기 후반에 조선의 산천을 산경(山經)과 산위(山緯), 수경(水經)과 수위(水緯)로 나누어 파악하였던 사실을 신경준의 산수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산줄기와 강줄기의 전체적인 구조를 날줄(經)로, 각 지역별 산천의 상세하고 개별적인 내용을 씨줄(緯)로 엮어 우리 국토의 지형적인 환경과 그에 의해서 형성된 단위 지역을 정리한 것이다.
신경준은 왕명에 의한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에 참여함으로써 당시까지의 문물과 제도를 정리하는 데 기여하였다. 동국문헌비고는 13고(考) 100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가운데에서 여지고는 17권으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핵심적인 위치를 구성하였다. 이 여지고는 신경준의 여러 역사와 지리에 관련된 저술들을 종합 정리하는 차원에서 편찬된 것으로, 고려와 조선 전기 자료와 연구성과뿐만 아니라 17세기 이후 전문적으로 역사지리를 연구하였던 한백겸, 유형원, 홍만종, 임상덕 등 관련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종합 정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