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일본속의 한국 문화를 찾아서(첫째날)
일본속의 한국문화를 찾아서
● 일시 : 2011년 1월 21일(금) ~ 25일(화)
● 장소 : 큐슈일대
● 인원 : 정진각선생님 외 9명
첫째날. - 1월 21일(금)
새벽 4시에 벨이 울린다.
지난 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며 겨우 잠을 청했는데 바로 일어나야 했다. 아직 잠이 든 동준이를 깨워 얼른 세수를 하고 준비를 하였다. 4시 30분. 밖은 아직 추위와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약속시간이 되어 정진각 선생님을 태우고, 이어서 반월 양촌마을으로 가서 박재성선생님을 태우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공항 2층에 10명이 모두 모였다. 안산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 7명을 포함하여 모두 10명이 출발하였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KAL기에 몸을 실었는데, 국적기라 그런지 편안한 마음으로 이륙을 하였다. 창 밖을 내다보며 처음 타보는 비행기에 마냥 신기해 하는 동준이를 바라보면서, 이번 답사를 생각했다. 전체 일정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의미 있는 답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간단한 간식을 먹으며 따끈한 커피 한 잔을 하고 나니 벌써 도착 시간이 다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가까운 것을......
후쿠오카 공항에 내렸을 때 첫 인상은 한국의 김포공항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항에서 먼저 호텔로 가는 첫 교통편이 지하철이었다. 많은 분들이 처음 가보는 일본에, 처음 타보는 지하철이라 모든 것에 신기해 한다.
호텔에 짐을 맡기고 우선 허기진 배를 채우러 회전초밥집으로 향했다. 이 집은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100엔 초밥집이었다. 일본에서의 첫 식사. 자리에 앉자마자 눈 앞에 지나가는 초밥들이 먹음직스러워 손이 먼저 간다. 한 접시, 두 접시 먹다보니 어느새 5접시를 넘어서고 이어서 8접시를 채우자 배가 찬 느낌이 들었다. 다양한 메뉴로 가득찬 초밥들이 입맛을 돋우어 그런지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나중에 계산을 해 보니 남자들 5명이 먹은 값은 모두 약 5,000엔 이었다(한국에서 환전할 때 100엔에 1,360원 가량).
이번 답사는 큐슈이다. 그것도 북큐슈 일대의 우리 역사와 관련된 유적지를 찾아가는 답사이다. 큐슈는 일본의 서남단에 있으며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개의 큰 섬 중에서 혼슈, 홋카이도 다음가는 크기이다. 행정구역은 후쿠오카(福岡), 사가(佐賀), 나가사키(長崎), 오이타(大分 ), 구마모토(熊本), 미야자키(宮崎), 가고시마(鹿兒島)의 7개 현으로 구성되었다. 이곳은 쓰시마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대륙문화가 가장 빨리 들어온 선진 지역이었고, 문화적으로도 한반도와 가장 유사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한편으로는 대륙 침략의 전진기지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일본은 철도의 나라 처럼 보였다. 그만큼 다양한 철도가 있으며 서비스가 좋다. 가장 빠른 신칸센(新幹線, 신간선)부터 도큐(特急, 특급), 교코(急行, 급행), 가이소쿠(快速, 쾌속), 후쓰우(普通, 보통)가 있다. 그리고 철도회사는 크게 JR과 사철이 있는데 JR은 원래 국영이었지만 지금은 민영화 되었다. 그리고 사철이 있다. 참, 우리 안산의 수인선도 1937년에 경동철도주식회사가 세운 사철이었다.
점심을 마친 우리 일행은 하카타역에서 사철을 타고 수성역에 내렸다. 수성(水城), 이름에서 뭔가 냄새가 났다. 물로 세운 성은 아닐테고, 아마도 물과 관련된 성이리라 짐작이 된다. 역에서 나와 약 100여 미터를 걸어가니 수성과 관련된 안내판이 보였다.
이곳은 664년 당(唐)과 신라(新羅)의 공격에 대비해 쌓은 방위시설 이다. 규모는 전체 길이가 약 1.2km, 기저부의 폭은 80m, 높이가 10m를 넘는데, 모두 사람의 손으로 쌓은 인공의 토루(흙제방)이다. 바다쪽(하카다쪽)으로는 폭60m, 깊이4m의 수로를 만들어 물을 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水城(미즈키)이라고 부른다. 이 근방[春日市、大野城市]에도 다른 소규모의 미즈키가 남아있다.
미즈키[水城]는, 하카타만 방면에서의 공격으로부터 다자이후[大宰府]를 지키기 위한 방어선이 되는 직선 모양의 굴과 토루이다. 토루(土壘)는, 높이 10미터 이상, 폭 80미터로 길이 1.2Km에 달한다. 그 하카타만 측에 있던 굴은, 폭60미터, 깊이4미터로 물을 저장하고 있다. 토루에는 2개소에 개구부(開口部)가 있었던 것이 발굴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토루의 내부에는 미카사가와[御笠川]에서 굴에 물을 보내기 위한 나무로 된 수로가 놓
여있다.
남서의 능선 너머에, 코미즈성이라 불리는 길이 80미터의 토루가 있다. 이는 주요부의 미즈키와 함께 다자이후정청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보인다.
미즈키[水城]의 용도에 대해서는 이것이 단순한 성벽이 아니고, 만일의 경우는 미카사가와를 막아 외측의 카라호리에 적병이 들어 온 곳에 물을 단번에 방류하고 이것을 흘러가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설이 있으나 대용량의 물을 저장하는 시설이 발견되지 않아 설득력이 부족하다.
수성에서 어렵사리 마을버스 노선을 확인하고 모두 버스에 올라탔다. 작은 마을버스는 마을을 돌아 다자이후로 향했다. 버스 승객은 노인들 몇 분이었지만 버스기사는 친절하게 안내 방송을 계속해 주었다. 마을을 지나 몇 정거장을 지나자 곧 다자이후 정거장이 나왔다. 버스에서 내리자 중, 고등학생들이 막 하교를 하였는지 길거리를 지나간다. 한국에서 보던 불량스러운(?) 학생들 모습은 찾을 수 없고 모두들 단정하다.
다자이후에 도착하였다.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어 그 규모를 상상으로만 가늠하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규
모였으리라 생각되었다
.
다자이후(太宰府)는 1,300년전 큐슈 전체를 통치하며 일본의 서쪽을 방비하기 위한 방위를, 외국과 교섭의 창구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다자이후의 성은 663년 한반도의 백촌강 전투에서 패한 후 백제 망명귀족의 지도에 의해 만들어 졌다. 수성, 대야성 기이성을 축조하고 자연의 산들을 에워싼 나성에 의해 방비되어 안에는 조방이 배치되어 있었다.”
큐슈의 중심 다자이후의 정청은 산을 배경으로 남향하고 남문, 중문, 정전을 중심축으로 좌, 우대칭으로 배치 되었던 웅장한 관청이었음을 남아있는 주춧돌이 말해주고 있었다. 남아있는 주춧돌을 보면 각 건물들 간에 격을 달리하여 질서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모두들 인증샷(?)으로 흔적을 남기려는 듯 열심히 셔터를 누른다.
다자이후를 나와서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관세음사가 나왔다. 그런데 입구에 이상한 글씨가 적혀 있는 비석이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언뜻 이해가 안되는 글이었다. 무슨 내용일까? 자세히 살펴보니 ‘불허훈주육입경내(不許葷酒肉入境内)’라고 써 있다. 이것은 냄새가 강한 야채(파, 부추, 마늘 등)나 술, 고기는 수행을 방해하기 때문에, 사찰 안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표지석 이었다.
이곳에서 열심히 수행했을 스님들을 생각하며 경내로 들어가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다.
경내는 조용하고 깔끔했다. 한쪽켠에 모래를 동심원 모양으로 해 놓은 곳이 있어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왜 이런 모양을 해 놓았을까? 아마도 불심(佛心)이 동심원처럼 퍼져 나가라는 뜻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고개를 돌려 보니 소담스럽게 핀 매화가 시선을 끌었다. 얼른 향을 맡아보니 그 진한 매화향이 온 몸으로 퍼졌다(문득 아파트 베란다에 막 꽃을 피운 청매화 생각이 났다).
정선생님께서 우리 일행을 일본 국보로 지정된 종으로 안내를 하였다. 일본종과 한국종의 차이점을 찾아보라고 즉석에서 숙제를 주신다. 모두들 열심히 찾아본다. 소리통이 없네요, 종이 높이 걸려 있어요,
비천상이 안 보이는데요? 모두들 차이점을 잘도 찾아낸다. 역시 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들이라 대단하시다. 정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종 가운데를 중심으로 나 있는 십자가 선이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해 주신다. 오! 역시......
관세음사를 나와서 버스를 타고 다자이후 덴만궁으로 향했다.
이곳은 903년 다자이후로 좌천되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일본의 유명한 학자 스가와라노 미치자네[管原道眞]를 주신으로 모시고 있는 곳이다. 미치자네는 어릴 때부터 학문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18살 되던 해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고, 23살에 수재(秀才) 시험에 합격하여 문장박사가 되었으며 55세 되던 해에 우대신(右大臣)이라는 고위 관직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권문세족이었던 후지와라[藤原] 가문의 모략으로 다자이후 관청의 수령으로 좌천되는데 그의 나이 57세 때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이곳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고 한다. 학신을 모시는 곳이라 입시철이면 발디딜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학생, 학부모들이 찾아와 합격기원을 한다고 하니, 우리나라 대구 팔공산 갓바위가 생각났다.
일본 신사에 가면 늘 볼 수 있는 것 중에 오미구치와 에마가 있다.
그런데 이곳에도 에마가 많다. 이곳이 합격기원을 바라는 곳이어서 그런지 에마의 내용도 대부분 합격을 기원하는 내용이 많이 보인다. 그런데 이곳에 한글이 보여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이곳에 까지 와서 여러 가지를 기원하는 모습을 보며 인간의 마음은 다 같은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덴망궁에서의 마지막 답사를 마치고 이곳의 명물인 구운 모찌를 먹으며 내려왔다. 마침 기차 시간이 다 되어 기차 표를 끊으러 매표기 앞에 섰는데 막 기차가 출발하려고 한다. 일행은 모두 서둘러 기차로 뛰어 갔는데 아~ 이 매표기에서 표가 나오지 않는다. 어쩌나 500엔 짜리 동전을 아무리 넣어도 인식이 되지 않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동전이 불량이라 매표기에서 인식을 하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1000엔짜리 지폐를 넣어 표를 사서 서둘러 기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기차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동준이와 둘만 달랑 남게 되니 순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차분히 상황을 정리하고 다음 기차시간을 보았다. 잠시 후에 떠나는 기차가 있었고, 곧 받로 정선생님이 문자를 보내왔다. 환승역인 이일시(市) 역에서 기다리고 있노라고...... 휴.
하카타역으로 돌아오니 하루의 피로가 몰려온다. 모두들 지난 밤 잠을 못 이룬데다가 새벽에 집을 나서서 공항에 모여 왔으니 얼마나 피곤할까. 여성분들은 저녁도 먹지 않고 숙소에서 해결한다고 하여 역 지하 식당가에서 생선 정식을 먹고 숙소로 들어갔다. 정말 길고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