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스크랩] 최경, 인물화의 대가

박영희 2011. 8. 24. 16:07

최경, 인물화의 대가

 

 

1.인물화에 뛰어난 천재 화가

지난 해 안산에서 지역사를 연구하는 후배가 전화를 하였다. 평택에 최경의 묘가 있는데 알고 있냐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몇 년 전부터 연구했던 자료가 있어 답사하고 싶으면 평택으로 오라고 큰 소리를 쳤다. 최경은 독곡동과 송탄동의 수성 최씨 평택 입향조다. 또한 수성군 최유림의 아버지이며 사림파 학자 최자반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최경은 평택과 연고가 있는 사람 가운데 국사교과서에 언급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최경의 고향은 경기도 안산이다. 실록에도 안산의 염부(鹽夫)의 아들이었다고 기록되었다. 소금 굽는 상민의 아들이었던 최경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비범한 재주를 보였다. 때때로 막대기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는데 솜씨가 놀라워 칭송이 자자했다. 세간의 입소문 덕분에 전문화가 양성소인 도화서에 들어간 최경은 피나는 수련을 달게 받아들였다. 실력이 쌓일수록 견문도 넓어져서 나중에는 신분의 벽을 넘어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하고 싶은 야망도 품게 되었다. 그가 그림의 다양한 장르 중에서도 인물화에 남다른 재주를 지녔던 것도 어쩌면 신분상승의 욕구와 관련 있을 것이다.

도화원에서 인물화에 뛰어난 화가쯤으로 치부되던 최경에게 우연히 정치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건 천운이라고 할 만큼 우연한 기회였다. 최경이 그린 인물화 중에는 세조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즉위하지 못하고 사망한 의경세자의 영정이 있었다. 의경세자가 사망하자 영정은 장남 월산대군에게로 넘어가서 사저(私邸)에 보관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며 월산대군의 동생인 성종(成宗)이 월산대군의 사저에 들렀다가 영정을 보게 되었다. 두 살 때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 인수대비 손에서 외롭게 자란 성종에게 처음 대하는 아버지의 영정은 놀라움과 감동이었다.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던 성종은 그림을 그린 화가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 뒤 최경의 인생이 어떻게 변하였을지 독자들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진주 소씨와 혼인하여 평택과 인연

최경은 무반직으로 당상관에 올랐다. 당상(堂上)은 고위관리의 기준으로 어전에서 임금과 무릎을 맞대고 정치를 논의할 수 있는 지위를 말한다. 하찮은 상민출신에다가 도화원 출신의 화원에게 당상을 제수하는 것은 당시의 통념과 법도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건이었다. 실록에도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도 오르지 못한 대단한 지위라고 기록하여 얼마나 파격적인 인사였는지를 말해준다.

최경이 평택과 인연을 맺은 것은 생애 말년으로 짐작된다. 큰 아들 최유림의 부인은 진산() 소씨인데 평택은 진산() 소씨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후손들도 번창해서 큰 아들 최유림은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고 세조의 정난에 참여하여 원종공신 3등에 오르더니, 나중에는 이시애의 난에서 적장 김말손을 사로잡아 거듭 적개공신 3등이 되었다. 손자 최윤신도 사마시에서 생원, 진사시에 동시 합격하고 부친의 음덕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증손자 최자반은 사마시에 합격한 뒤 독곡동 오좌울 입구에 모정을 짓고 사림의 저명한 학자 최수성, 조광조, 김안국 등과 교유하여 이름을 높였다. 그 뒤로도 관직에 오른 자가 여럿이며, 해방 후에는 포승읍 석정리의 최석화가 제헌국회의원을 지냈다.

안견과 함께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화원 출신의 화가이며 평택지역 수성 최씨의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최경에 대한 지역적 인식은 매우 낮은 편이다. 평택시민 대부분이 최경의 묘가 도일동에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전 경기도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이었던 정진각 선생은 이와 같은 무지를 놀라워한다. 과유불급이라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무지로 선양되어 마땅할 인물이 역사적으로 조명 받지 못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학술적인 연구와 그에 걸 맞는 선양이 조속히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2011.4.13.)

출처 : 평택향토사이야기
글쓴이 : 바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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