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미워만 할 수없는 일본을 다녀와서 --- 제 3 일
셋째 날 : 2012.2.2.(목)은 광륭사(廣隆寺 고류지) 방문으로 시작했다. 쾌청하나 눈발이 가끔 날린다. 날씨가 봄 같은데 봄은 아닌 것 같고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다. 春來不似春이라더니,봄은 이렇게 이 세상에 오나보다. 경내에는 매화가 보이고 이름 모를 빨간 열매 그리고 나무들은 새눈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 일행이 매표소에서 표를 다 구입했는데 바로 한국인 여학생들이 나타났다. 경북 영주에서 온 고등학생 단체관광이다.
고류지에는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고대 신라 목조불상이자 일본국보 제 1 호 “보관미륵보살 반가사유상(寶冠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 있는데 관람객의 촬영을 단속한다고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이번에는 정진각 선생님께서 꼭 촬영을 시도하시겠다고 하여 더욱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언감생심 그 사유상 옆에 노인이 지키고 있다. 그러나 열성팬들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고 나는 충전 불량으로 어제부터 촬영할 수 없게 되어, 감시하고 있는 노인과 서툰 일본말로 수작을 걸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엄하게 옆에 서있는 줄 알았다면 아예 연극을 꾸며 다른 사람들이라도 몇 장 더 찍을 기회를 만들 걸 그랬다. 다음 모임 때 그 몰카 사진들과 이면석 사진을 가지고 왔으면 좋겠다.
이 불상 역시 신라에서 일본에 보내주었다고 하는 고대 일본 왕실역사책인 “扶桑略紀” 등에 기록이 있다고 하며 고류지가 있는 곳을 우즈마사(太秦)지역이라 하는데 太秦이란 지역명은 하타(秦)씨의 핵심 근거지로 하타(秦)씨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이니까 우리와 관계가 깊다. 돌아 나오며 큰 길 왼쪽 옆에는 동영태진영화촌(동영太秦映畵村)을 지나 10:44분에 용안사(龍安寺)에 도착했다. 주차장에는 관광버스가 5대 소형 버스가 4대가 넘는 것 같은데 모두가 유명한 MK(교포가 운영하는 교통회사)사의 큰 봉고들이고 자가용도 5대나 보인다.
龍安寺(료안지)는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고 선(禪)의 경지를 나타내는 카레산스이 정원(庭園)의 대표적 명소로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과연 감탄할 만한 정원이었다.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왼쪽에 방장(方丈)이란 현판이 붙은 큰 방이 3,40평으로 보이는데 넓은 바닥을 다담이로 깔았고 방 왼쪽 앞의 마루가 대단히 넓고 이어진 마당엔 흰색 모래가 깔려있고 돌 15개가 묘하게 배치되어 있다. 계속 왼쪽으로 돌아 뒤뜰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생수를 받는 돌그릇을 우리나라 엽전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 가운데를 정사각형으로 깊게 파내어 그릇을 만든 것이다. 마루에서 내려가 그 깨끗한 물을 마셔보았다. 그 돌 가운데 사각형 홈을 口(입구)字로하여 만들어진 4자 성어가 吾唯知足이란 불가의 명언이었다. 방장을 돌아 나오면서 通氣, 雲關의 족자와 대형 12폭 병풍 등을 감상하면서 일본 불교사원의 정서라 할까 분위기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龍安寺 글자 그대로 龍이 승천하지 않고 이승에서 편안히 사는 절(자연환경)이 이런 곳이 아닌가? 상상해 보았다. 용안사에서 11:45분에 출발하여 11:49분에 금각사(金閣寺)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대로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안내된 식당은 우리 교포가 운영하는 비빔밥 집이었고 운전기사님도 우리 교포 2세였음을 알았다.
金閣寺는 본래 金閣 鹿苑寺가 원이름인 것 같다. 鹿苑이라는 뜻과 같이 절 경내가 모두 정원인데 사슴은 안 보인다. 그리고 方丈이란 의미도 정원이라는 개념이라고 파악하게 됐다. 입구에 方丈特別展 입간판을 보면서 들어간 금각사는 그림같이 황홀했다. 오전에 본 용안사에서 방장이 정원이라고 이해했는데 아! 金閣寺 건물 자체가 호수 안에 자리 잡은 금색 건물의 별장같다. 이 곳 역시 개방하지 않아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이곳에 별장을 지어 살고 싶은 곳이었다. 너무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보면서 이곳에서 수도하시는 스님들이 대부분 득도하여 성불을 하셨겠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금각사의 일상생활과 환경과 시간들이 오히려 환속의 게기가 될 수 있었겠다.는 상상을 내 나름대로 해 보았다. 하기야 일본의 승려들은 대처승이 아닌가! 이 절도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황홀감을 느낀 金閣 鹿苑寺를 작별하고 13:52분에 淸水寺에 도착했다.
淸水寺(기요미즈데라)는 절 이름 그대로 산 중턱 경내에 聖水로 통하는 맑은 물 세 줄기가 무한정 폭포처럼 흘러내린다. 의미심장한 절의 역사와 내력은 뒤에 읽어보기로 하고 느낌을 솔직히 말하면 청수사와 주민들이 함께 어울려 관광객 유치에 주력하여 장사하는 동네의 맨 위에 있는 절이 청수사라고 생각됐다. 젊은 관광객이 정말 많았다. 이번 여행 중에 일본 전통 옷 기모노를 입은 사람들을 볼 수 없었는데 여기 오니까 눈에 많이 띠어 대충 헤아려 보았다. 총 40명이었고 이중에 남자가 6명이 포함되어있었다. 주차장에서부터 절 입구까지 길도 멀었고 경내 순로를 돌아서 주차장까지 오는 전체거리가 2Km가 넘는 것 같다. 부지런히 걸어서 성수를 먹으러 갔는데 줄이 10m는 되는 것 같다. 우리 일행 중에 내가 제일 빠르리라고 자신했지만 나보다 먼저 와서 물을 마시고 있는 자주색 모자를 쓴 중학생을 발견할 수 있었다. 15:05분에 발차하여 미미즈카(耳塚)로 갔다.
미미즈카(耳塚)은 처음에는 코무덤(鼻塚)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귀무덤(耳塚)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 슬프고 어이없는 역사의 현장이다. 1597년 9월 교토 호코지(方光寺)에 5만인분의 무덤을 쌓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전체는 10만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에 의하여 이렇게 비인간적인 못된 짓을 했다고 하는데 그 불구대천의 원수 풍신수길의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가 바로 귀무덤 옆에 있다. 귀무덤에서 묵념을 드리면서 호국영령들의 평안을 빌며 내 자신과 나라를 돌아보며 힘을 길러야 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침략자 그 원수의 신사까지 보고 왔다. 그 시대 우리의 조상 조선 사람들은 침략을 당하고도 그렇게 잔인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현대의 일본 사람들을 좋게 보아주려해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오늘은 이런 기분으로 일정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