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향토사박물관

[스크랩] 안산에 있었던 내시들의 마을을 아시나요?

박영희 2012. 4. 22. 12:44

 

 

안산 개발전 원시동 시우마을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다. 

 

 이 지역에 내시들이 모여살았고 지금 그 흔적은 무덤으로 남아있다.

내시들이 가족을 형성하여 모여살 수 있었을까?

 

조선시대 내시들에게 가족구성을 용인하였다.

이유는 기본적으로 환관의 생활안정과 지속적으로 환관을 충원하려는 필요에 있었다.

왕과 함께 조선을 주도했던 양반들은 왕권을 견제하기 위하여 환관들을 친족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정치적 발호를 방지하려고 하였다.

이 결과 친족과 사회로부터 강제로 격리된 환관들은 양부모와 非血緣的 부자관계를 맺었다. 그렇지만 바로 이런 이유에서 환관 가족들은 혈연적 친족 못지않게 강력한 결합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혈연적관계가 없는 양자였기때문에 각자 원래의 성을 유지하였다.  조선시대 환관은 자신의 父系血緣으로부터 철저하게 차단 당하였기 때문에 혼자 살 수 밖에 없었다. 이 같은 환관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부인을 얻는것도 용인되었다. 이들은 환처(宦妻) 또는 동정녀(童貞女)라 불렸다.정상적인 부부생활은 할 수 없었지만 부인에게는 당시 일반 부녀자들과 같은 법도가 적용되었다.

 

尙膳 李景禧의 묘비

 

조선시대 환관 가족은 환관들의 정치적 발호를 억제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부양할 가족도 없을 경우 목숨걸고 권력에 끼어들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조선시대의 환관 가족은 생활안정 및 환관충원, 동시에 환관들의 정치적 발호를 억제하는 기능을 하였다. 조선시대 권력에 끼어든 내시들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은 이면에는 양반관료들의 신권뿐만 아니라 내시의 가족제도라고 하는 장치 때문으로 보인다. 

환관은 궁안에 거주하는 장번(長番) 환관과 궁궐 가까이 거주하면서 출퇴근하는 출입번(出入番) 환관이 있었다. 히 왕을 근시하는 장번 환관은 대전 장번 내시로 대감 호칭을 받을 만큼 부귀 영화를 누리기도 하였다.

 

 

尙膳 劉仁黙 의 묘비   그의 양자는  林宜馥임을 밝히고 있다.

 

 

尙膳  林宜馥 의 묘 

 

그러나 현장 답사결과 묘비와 망주석 그리고 봉분의 위치가 서로 격식에 맞지않고

현지주민의 증언을 들어본 결과 공단 조성과정에서

묘비와 상석 망주석들을 마구 옮겨놓았다 한다

대충 둘러보아도 봉분 위치가 교란되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정밀조사가 있어야할 것으로 판단된다.

 

 

출처 : 안산지역사연구모임
글쓴이 : 우리마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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