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 화성』
『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 화성』
김동욱 지음/ 돌베개 펴냄 2012, 5,20일 읽음
화성 행궁 : 일제 강점기 때 파괴
1989년 10월 수원에서 화성행궁복원추진회가 결성. 1991년 행궁 자리에 있던 도립병원의 이전이 결정됨 1996년 7월 복원 공사 착수- 2002년까지 이어짐
행궁이란 왕이 궁궐을 떠났을 때 잠시 머무르는 곳
쓰임새 : . 전쟁 -몸 피신하여 나랏일 봄 - 강화 행궁, 의주 행궁, 남한산성
. 휴양 - 온양 행궁
. 무덤 참배 - 화성 행궁(행궁 중 가장 큰 규모)
화성 짓게 된 이유
*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1735~1762. 28세에 죽음.) 묘를 옮기면서( 천장 작업은 정조 13년 1789년 7월 말 시작해서 9월 말에 마무리 됨)원래 경기도 양주 배봉산 자락( 지금의 서울 전농동 서울시립대학교 뒷산. 토질이 나쁘고 지세가 좋지 않다.)에 있던 것을 수원 화산으로 옮겨옴 (영우원-현륭원)
* 현륭원에 대한 정조의 말
“나라 안에 능이나 원(園)으로 쓰기 위해 봉표해 둔 것 중에서 세 곳이 가장 길지라는 설이 있다. 한 곳은 홍제동으로 바로 지금의 영릉(효종과 인선왕후의 쌍릉)이 그것이고,
한 곳은 건원릉(태조의 능) 오른쪽 등성이로 바로 지금의 원릉(영조의 능, 정순왕후와 합장묘)이 그것이고, 한 곳은 수원 읍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수원에 대한 윤선도의 말
수원읍 뒷산에 대해서는 17C후반에 윤선도가 신라 말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이 이 터를 가리켜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다. 참으로 복룡대지로써 용이나 혈이나 지질이나 물이 더없이 좋고 아름다우니 참으로 천리에 다시 없는 자리이고,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자리이다.”
고 평한 글을 정조가 인용했다.
. 팔달산 옛 이름 : 탑산 -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서 발견
-탑산 : 조선 태조 때 이곳에 삼학 중 하나인 ‘이고’가 은거함. 벼슬을 내려도 응하지 않음. 왕이 화공한테 탑산을 그려오게 함. 그림을 본 태조가 “아름답고 사통팔달한 산”이라고 함. 그 후에 팔달산이 되었다.
- 유형원(1662~1673):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전북 부안군 우반동에 살았다. 1만권의 고금서적을 탐구하고 새로운 사상을 바탕으로 국가 체제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함.
『반계수록』은 사후 100년이 지나서 간행됨. 이 책에는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종래의 경제. 사회 제도를 전면 개혁하자는 혁신적인 내용이 수록됨. 토지제도를 토대로 세금, 과거, 교육, 군사 등 전면적으로 개혁하자고 주장하며 토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 - 수원을 교통의 중심이라 수록됨
정조는 반계에 대해“ 100년 전에 살던 사람의 생각이 현재의 일을 마치 촛불을 밝혀 꿰뚫어 보듯이 부합된다고 칭찬했다. 나아가 유형원에게 이조 판서 및 성균관제주의 벼슬을 내리고 그 후손을 찾아보도록 했다.
. 수원 백성들 이사 할 때 이사비용 줌 그리고 세금 면제 - 일성록에 기록
1789년 7월 이주 시작- 이주 대상은 244호. 호주 이름, 관직, 집 크기와 이주 비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집이 초가 3칸 이익상은 보상비로 6냥 받음.
-초가 4칸 이복돌은 집값 5냥, 이주비 11냥 받음.
-22칸 김태서는 집값 56냥. 이주비 35냥 받음.
-아전 나태을(동네 유일의 기와집) 은 집값으로만 400냥 . 이주비 120냥 받음.
당시 쌀값은 한 섬에 3냥. 섬은 약 160kg(쌀 2가마니)
1789년 9월 말까지 이주 완료 예정. 10월 정조가 수원 행차 예정
-새 고을에 이주한 사람들도 1년간 세금 면제.
* 당파 싸움으로 약해진 왕권 강화하기 위해 화성 "신도시"처럼 만들어서 천도할 생각 - 한양에 뿌리 둔 양반 기반 약하게 할 계획
화성 설계
*총 책임자 : 채제공 (1720~1799) 화성 축성 끝나고 정조가 큰 호랑이 가죽 한 벌 하사)
설계 : 정약용
*공사 관리자 :화성 유수 조심태 (1740~1799) 무과 급제함. 무관으로는 드물게 명필. 궁궐 책임진 훈련대장으로 있다가 수원부사로 임명 됨. 화성 축성 끝나고 정조가 당상관으로 품계를 올려 줌)
현장의 모두 주관한 도청- 이유경. (축성이 끝나고 정조가 갑옷 한 벌 하사 함)
*인원 : 장인 - 1850명 동원 - 전국적 -- 각자 맡은 건물, 돌 , 장소에 이름 새김
월급 지급 - 당시 나라에 부역 나가면 월급 주지 않음 점심 주지 않음
군사부 일체 - 임금 : 스승: 부보 = 일체
부모가 심부름 시키면 돈 받나 ?
*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누구인가
어려서부터 영특 - 15세때부터 영조 대신 대리 청정
당시 당파 싸움 노론: 소론
노론이 기득권 - 사도 세자 왕위에 올라가면 불안 영조에게 모함 -영조 화 남
사도세자 아버지인 영조에게 인정 못 받자 속상 함 - 이상한 행동하기 시작
영조가 뒤주에 가두어 죽임 - 정조 나이 11살
@ 화성이름의 유래 : 현륭원 있는 곳 화산(花)山) - 화산 사람들이 성인(聖人)을 축하 한다는 뜻
-화성華城은 장자 「천지」편에 나오는 ‘화인축성’에서 유래. ‘화’지방의 제후와 요임금이 덕을 기르는 군자의 도리를 논한 것. 즉 신도시 화성은 ‘요임금 같은 성인이 덕으로서 다스리는 곳’이라는 의미. 화성(華城)의 화(花)와 화(華)는 음과 뜻이 모두 같아서 화산의 뜻이라고 채제공에게 설명함.
화성을 "유수부"로 승격 - 오늘날 광역시
경기도에서는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과 인조의 피신처인 강화, 남한산성이 있는 광주가 유수부로서 행정적 군사적 중요한 도시 역할을 담당했다.
유수의 직위는 지방 관직이 아닌 중앙 관직인 경관직.
화성부와 광주부의 유수는 수도 한성부의 장관인 한성판윤과 같은 정 2품.
당시 전국 8도의 관찰사가 종 2품임.
# 유수제도 : 중국에서 황제가 수도를 비우게 될 때 유수를 두어 수도 지키게 함
대부분 옛 도읍지에 유수를 두어 행장을 맡게 함
우리나라 고려 때부터 있었다.
-수원 신읍을 번성하게 하라-
* 좌의정 채제공의 발의로 수원 신읍에 부자들과 백성들을 모아들이는 방안이 본격적으로 논의 됨. 채제공은
1) 서울 부자 30 여 호에게 무이자로 1,000냥씩 빌려 주어 이들이 수원에 와서 시전을 짓고 장사를 하게 하자는 방안을 제시함.
2) 수원과 그 부근에 5일장을 설치하여 신도시를 중심으로 장시를 상설화하고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면 상인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룰 것.
3) 수원부에 1만 냥 정도의 돈을 주어 기와를 굽게 한 후 이익을 남기지 않고 판다면 도심부에 기와집들이 곧 들어설 것이다.
→ 시전을 새롭게 설치하는 것은 서울 상인들과 대립할 염려가 있다는 점을 들어 반대.
*수원 부사 조심태가 구체적인 상업 진흥책 제시
1) 수원 지역 사람들 중 여유 있고 장사를 아는 자를 택해서 읍에 살게 하면서 자본금을 주고 이익을 얻어 살게 함이 상책이라고 주장.
2) 이를 위하여 돈 6만 냥 정도를 중앙 정부에서 얻어 이 돈을 빌리기 원하는 부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매년 이자를 쳐서 3년 기한으로 본전을 거둬들이면 백성들이 모일 것이라고 주장.
→ 좌의정, 우의정의 전폭적 지지 얻으며 실행. 수원 상업 발달의 토대
* 화성성역의궤
-1801년 (순조 1년)에 간행됨.
수원화성, 행궁을 건축할 때 자세한 설명과 그림으로 그려져 있어 무너지면 그것을 보고 그대로 복원 할 수 있고 거중기의 자세한 그림도 그려져 있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책이다.
-다른 의궤가 대부분 필사본으로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금속활자를 이용해서 간인된 것이 특이하다. 약 200권 정도 인쇄함.
-사용된 활자는 정리자로 정조의 명으로 새로 만든 활자이다.
-구성은 본편 6권과 부편 4권으로 구성.
* 화성 공사에 사용된 기구들
-거중기: 1부. 도르래를 활용해 돌을 들어올리는 장치. 왕실에서 제작해서 공사장에 보냄.
정조가 내려준 『기기도설』을 참고해서 정약용이 새롭게 고안해 낸 장치. 『기기도설』 는 명나라 때 중국에 귀화한 스위스인 요한넨스 테렌츠가 쓴 책. 중국명 등옥함으로 선교 사 겸 과학자.
-유형거- 11량
-대거-8량( 소 40마리가 끄는 수레. 제일 큰 돌 운반)
-평거-76량 (소 10마리가 끄는 수레. 중간 돌 운반)
-발거- 2량 (소 1마리가 끄는 수레. 작은 돌 운반)
*장용영: 정조는 즉위 9년 째에 1785년에 국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위 창설.
1793년에 장용위의 규모를 군영으로 확대.-장용영
장용영은 내영과 외영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영은 도성을 방어하며 외영은 화성을 방어한다. 장용외영의 군사는 5,000명으로 용인, 진위, 안산, 시흥, 과천에서 뽑힌 장병들로 구성되었다. 또 외영은 5위로 구성이 되었는데. 동쪽은 창룡위, 남쪽은 팔달문, 서쪽은 화서문
북쪽은 장안문. 중앙은 신풍위이다. 외영은 정조가 화성에 행차하면 행궁 호위 유사시 성곽 호위, 정조 승하 후 순조 2년에 폐지
행궁의 명칭
정문: 신풍루 -신풍루의 원래 이름은 진남루이다. 중국 한나라 제1대 황제인 고조의 고향인 풍패의 풍자를 따서 붙임.(풍패는 중국 쟝수성 패현)
신풍이란 왕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
정조는 강력한 왕권을 누리던 중국 한나라를 왕조 통치의 이상으로 삼은 듯하다.
화성 건설 과정에 한나라에 관한 글이 많다.
정조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내려주는 사이에 의식이 거행 됨.
봉수당 :(혜경궁의 장수를 축하한다는 뜻)
행궁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장남헌이었다. 정조가 현륭원 전배때 이곳에 머물렀는데, 혜경궁 홍씨의 회갑 때 이곳 이름을 봉수당으로 고쳤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장수 축하 한다는 뜻으로 봉수당으로 지었고 실제로 이곳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치러졌다 . 풍류가 끝나자 정조는 친히 어머니의 복록장수를 비는 7자의 시를 지음.
잔치는 날이 저물때까지 계속 됨. 해가 저문 뒤에는 행궁 건물 사면에 홍사촉롱을 걸고 좌정한 사람도 놋쇠로 만든 촛대를 나누어 들어 마치 대낮 같았다.
왕의 8일간의 행사.
장락당
: 봉수당의 행랑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곳은 혜경궁 홍씨가 머무르던 곳이다. 정조 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봉수당으로 움직일 때 흙을 밟지 말라는 뜻으로 봉수당 과 장락당을 작은 통로로 연결하여 놓았다 정조의 효심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라 고 할 수 있다.
혜경궁을 위해서 화성 축성시 새로 지은 행궁 건물이다.
행사에 쓰이는 지화 종류
준화: 궁중에서는 잔치 음식상을 차릴 때 각종 조화로 화려함을 더했다.
보통 병에 꽃을 장식하는 것.
상화 : 궁중 잔치 때 바닥에 꽂는 조화이다.
상화는 1단, 2단, 3단으로 된 세 가지 장식이 사용 된다.
득중정 :
정조가 행궁에 머무를 때 활쏘기를 하였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정자를 짓고 친히 득중정이란 현액을 썼다. 유엽전 30발 쏘아 24발이 명중됨. 영의정, 대신들과 함께 활 쏨. 혜경궁의 회갑을 하던 날 저녁에는 득중정에서 매화포를 쏘며 화려한 불곷놀이를 했다.
득중정 앞에 보이는 네모난 판은 활을 쏘는 좌석이다.
낙남헌
-왕의 집무실로 정조가 신하들을 접견하는 곳.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 북쪽에 위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때 이곳에서 특별 과거시험. 양로연,(화성에 사는 61세 이상된 노인 을 모셔 놓고 함께 축하했다.)군사들의 회식 진행
-원래 팔작지붕이었는데 꺾인 부분 사라지고 -자형의 건물이 됨
-공사기간: 1794년 8월 2일 공사 시작~45일 만인 9월 28일 공사 끝.
-특징: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행궁 건물. 일제 강점기 때 화성 행궁이 철거 될 때도 훼손되지 않음.
: 벽체석연 (잘 다듬은 석재로 네모난 틀을 만들고 틀 안의 빈 면을 벽돌로 채우는 새 로운 표현 방식)
: 계단 우석
계단 좌우의 소맷돌인 우석에는 구름문양이 돋을 새김되어 있다. 구름 문양은 특별 한 건물에만 시연 된다. 예를 들어 궁궐, 왕실 사찰 등에 새긴다. 화성에는 낙남헌과 동장대에만 있다.
( 우석은 우리말로 소맷돌인데, 계단의 양 측면을 넓은 돌판으로 막아 힘을 지탱 하고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 성곽
화성 축성 방식- 성벽의 안쪽은 흙을 돋우고, 바깥 쪽만 성벽을 쌓는 내탁 방식이다.
다산이 돌로 쌓는 석성 방식 제안-
우리 나라 사람이 벽돌 굽는데 익숙하지 않다. 벽돌로만 쌓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든다.
토성은 겨울에 얼어 터지고, 비가 오면 물이 스며들어 무너지기 쉽다.
조선 때의 축성 방식은 숙종 대를 기점으로 변화하여 큰 발전을 보였다.
* 성곽의 시설물
화성의 4대문
성문은 따로 성벽을 두텁게 쌓아 올리고 석재도 특별히 반듯이 다듬은 무사석(武砂石) 사용
동 : 창룡문 ( 청 ) 서 : 화서문 (흰) 남 :팔달문 (빨 ) 북 : 장안문 (검)
정문은 장안문이다
장안문과 팔달문은 화성의 얼굴이다. 이 두 문은 크기와 형태가 동일하다.
높은 석축에 홍예문 1, 그 위에 중층 지붕의 누각, 누각은 상하층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 기둥 위에는 다포식의 화려한 공포 사용. 지붕은 우진각 지붕을 얹었다.
(우진각 지붕은 서울의 4대문과 경복궁, 창덕궁의 정문 등 몇몇 특별한 곳에서만 한정적으로 사용된다. 장안문, 팔달문에 우진각 지붕을 한 것은 화성 성곽의 격식을 높인다는 의미)
그리고 용마루와 추녀마루에는 취두와 잡상을 올렸다. 옹성 설치 (옹성은 벽돌로 축조) 옹성이 중앙에 위치
(화성성역의궤에 장안문과 팔달문의 옹성이 중앙에 출입문을 둔 이유- 사통팔달하는 화성의 정신을 반영)
옹성 위에는 ‘누조’라고 하는 큰 물통이 있다. 여기에 물을 흘려 내보낼 수 있는 구멍이 5개 있다.- 오성지 (오성지는 이곳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나중에 다산이 보고 오성지는 잘못 만들어졌다고 했다.)
장안문과 팔달문의 좌우에는 적대가 있다.
한양 도성의 4대문 : 흥인지문 (동) 숭례문 (남 ) 숙정문( 북 ) 돈의문 (서)
화서문의 옹성(甕城) : 항아리 모양처럼 외벽을 둥글게 성 쌓음. 간혹 네모지게 쌓기도 함.
군사 시설 - 100m 마다 설치
. 암문 : 비밀문으로 물자 나름 - 5개 있다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위치
. 적대 : 성문의 좌우 성문 공격해 오는 적 막기 위함
포사 : 공격 시설 없이 군사가 머무르는 곳 - 성벽위에 숨어서 적을 살피던 군사가 신 호 보내고 깃발로 성안에 사람에게 전달
. 치성 : 성벽을 바깥쪽으로 튀어나오게 쌓음
. 서장대 :
장대는 평상시 장수가 군사를 훈련하거나 지휘하는 곳. 성 안팍을 관망하는 곳.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 성안이 한 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멀리 남쪽과 북쪽 들판이 다 보인다.
구조 - 2층 누각, 아래층은 사방을 개방하고 한가운데에 장수가 머물 수 있는 마루 둠.
위층은 사방에 창살을 달고 창을 내고, 바닥을 깔아서 군사가 올라가서 주변을 살 펴볼 수 있도록 함.
서장대에서 장대한 군사 사열식인 성조식이 치러짐. 이를 기념해 정조가 친필로 ‘화성장대’라는 현판을 썼다. 현판은 20세기 초에 사라져버리고 건물도 퇴락. 그래서 1971년에 서장대를 새로 고쳐 지으면서 현판도 이때 새로 달았다.
서장대는 좌우에 ‘외간’이라는 높은 깃대를 세웠다. 성안 사람들도 ‘외간’ 끝에 걸린 깃발을 보고 군사 조련이나 특별한 행사 등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상량문은 당시 우의정이던 채제공이 썼다.
.서노대 ;
팔각형 모양 -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다 - 쇠뇌라는 화살을 쓸 수 있게 만듬
중국의 병서 『무비지』를 보고 모방해서 지은 것이다.
. 동장대 :
평상시 군사 훈련하는 곳, 연무대라고 불림 .정면 5칸 측면 4칸 단층으로 된 팔작지붕.
구조-전면은 모두 개방되었고. 바닥은 전돌을 깔았다. 다시 한 단을 높여서 가운데 기둥 열 에 맞추어 전돌 바닥이 이어진다. 제일 뒤 쪽 퇴칸을 높은 마루로 만들었다. 여기서 장수가 앉아 지휘를 하거나 명령한다. 마루 주변에는 난간을 둘렀다.
건물 뒤에는 둥글게 휘어진 낮은 담이 있다.
담 아래쪽은 큰 돌을 모자이크식으로 쌓았다. (문석대)
그 위에 둥글게 구운 기와를 가지고 모자이크식으로 쌓았다. (영롱장) 아름답다.
경사진 길을 만들어 장수가 말을 탄 채 축대 위를 올라설 수 있게 했다.
- 공간이 넓어서 성안에서 벌어지는 큰 행사를 이곳에서 자주 치름. 많은 호궤행사가 이 곳에서 열렸다. 호궤란 주로 군인들을 대상으로 음식물을 베푸는 행사이다.
축성공사를 하면서 11차례 걸쳐 감독관, 장인들 및 일꾼들에게 호궤를 베풀었다. 그 중 6번을 이 곳 동장대 연무대에서 치렀다.
현안 : 성벽타고 적이 올라오면 끓은 물 또는 기름 붓는 곳
총안 : 적 공격할 때 몸 숨기고 총, 활 넣어서 공격
멀리 - 경사 없이 평평
.호리 전안 : 호리병 모양 - 밖 염탐 활 쏘는 곳
.서북 공심돈
:화서문 쪽에 위치 - 속이 빈 돈대라는 뜻.
화성에서 처음으로 설치해서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공심돈은 중국 병서인 ‘무비지’에 나온다. 원래 중국이 변방의 오랑캐를 방어 하기 위해 지은 곳인데, 화성의 지형 조건에 맞추어 만들었다.
구조- 3층으로 군사들이 몸을 감추고 머무는 별도의 집을 갖추었다. 공심돈은 원래 3곳을 축조했는데 지금은 남공심돈은 없어지고 2곳만 남았다.
동북공심돈 : 동쪽 창룡문 쪽에 위치. 3층 건물. 벽돌로 쌓음.
3층으로 오르는 계단 소라 모양처럼 생김 소라각이란 별명
‘화성성역의궤’에는 이 동북공심돈을 중국의 계평돈을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쓰여 있다.
계평돈은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약 50km 지점에 위치한 순천부 계주에 있는 공심돈이다. 계주는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이 다니는 길목으로 사신들을 통해서 그 모습이 국내에 알려졌으리라고 추측함.
벽돌세부- 비스듬한 각도의 총 구멍을 내기 위해 일꾼들이 직각으로 구워 낸 벽돌을 일일이 깎아서 필요한 각도를 만들어 냈다.
공사 마지막 해인 1796년 여름에 축성했다. 그동안 벽돌 굽는 기술을 익혀서 비교적 어려운 동북공심돈과 돈대는 마지막에 벽돌로 공사했다.
* 봉돈
: 통신시설 - 봉화 올리는 곳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
숫자 1- 주변 이상무
2- 적 출현
3- 적 가까이 옴
4- 나라 안까지 옴
5 - 전투시작 - 아주 위급
창룡문과 팔달문 중간 지점에 위치 - 화성 행궁이 정면으로 보임 - 행궁에서 봉화 가장 먼저 발견해야 하기 때문
서해 바닷가 흥천대와 용인 석성산 봉화대와 연결이 된다.
5개의 굴뚝을 모두 벽돌로만 쌓음. 국내에서 처음 시도 함.
화홍문 :
수원천의 북쪽에 세운 수문. 홍수 예방, 적 침입 방지, 다리역할
누각 아래 7개의 홍예문이 있다. 가운데 하나만은 나머지 것보다 크게 만 들었다. 시각적으로도 가운데를 크게 해서 안정감을 주도록 한 것이다.
7개 홍예문에는 사람이 다닐 수 없도록 철 기둥으로 가로 세로 엮어 만든 살 문이 있다. 물살을 쉽게 가를 수 있도록 북쪽 기둥의 하단부를 마름모꼴로 만 들었다. 이런 방식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시작해서 조선시대에 널리 쓰이던 방 식이다.
누각 주변으로 높은 담 설치했고, 담 구멍 곳곳에 총안 있다.
방화수류정 :
동북 각루라고 도 한다. 높은 위치에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곳이다. 실내 한가운데는 한겨울의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온돌방. 주변은 시원한 마루방.
방화수류정은 동서남북 위치에 따라 각기 달리 보이는 재미가 있다. 평면을 ㄱ 자꼴로 만들었다. 북쪽 연못으로 작은 쪽마루 퇴칸을 달아내고 사방에 난간을 둘렀다. 팔작 지붕을 ㄱ 자로 꺾어서 지붕을 짜고 다시 퇴칸이 생기는 부분마다 작은 지붕을 덧붙였다. 그
래서 지붕마루가 모이는 곳에 절병통을 세웠다. 속에는 짧은 기둥을 세워 사방으로 분산되는 재목들을 붙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절병통의 모양은 술병을 거꾸로 올려놓은 듯한 모습이다.)
방화수류정의 벽돌 문양- 주춧돌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에 벽돌을 쌓았는데, +자 모양의 연속무늬를 넣어서 아름다움을 더했다.
-1997년 (정조 21년) 정월, 정조는 연례적인 현륭원 전배를 마치고 방화수류정에서 활쏘기를 함. 세 번 과녁을 맞히고 왕은 친히 시를 지음. 3년 반 후에 붕어하심.
* 수원 팔경 :
팔달산 , 화홍문 (무지개다리) , 방화수류정 , 화산 남쪽의 버드나무, 만석대 저수지 연꽃, 축만제저수지 노을 , 광교산 흰눈, 화산의 봄에 진달래
* 화성 행궁 _ 1910년 완전히 파괴 - 행궁 역할 하지 못함 - 자혜의원 들어섬
1964년 성곽 수리 - 1974 대대적 수리 ( 화성 성역 의궤 - 당시 화 성 공사 모든 과정 기록 된 책 )
1997년에 유네스코에 등재 : 국제 연합 교육 과학 문화 기구
1945년 설립 - 현재 188개국 가입
우리나라 : 종묘, 창덕궁 , 수원 화성 , 고인돌, 불국사, 석굴암, 왕릉, 합천 해인사 장 경판전이 현재 등록 됨
* 무예24기 : 정조 임금의 명으로 1790년 장용영에서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가 펴낸 무예 도보 통지 무과 시험 과목이기도 하다
보예18기 + 마예 6기 = 총 24기
민간 무예와 달리 전투를 통해 검증되고 다듬어진것 활과 화살 위주여써 던 조선의 무예를 임진왜란과 같은 환난을 통해 칼과 창 그리고 권법이 포 함된 실전무예로 확장
* 목조 건축 구조: 기단부, 축부, 가구부( 지붕을 짜는)로 나눔
기단부: 건물이 들어설 위치에 흙을 다져서 일정한 높이의 단을 만들고 주춧돌 놓는 다. 신라 시대에는 기단 표면을 모두 돌로 정교하게 다듬고 주출돌도 원형, 기 둥이 설 자리에는 돋을 새김까지 했다. 고려 시대 중엽에 와서 자연 상태 그대로의 돌을 주춧돌로 하고 그렝이질 기법으로 목조를 다듬는 방식.
축부 : 일반적으로 벽체를 이루는 부분을 가리키지만 공포까지 포함한다.
축부의 기본: 기둥
격식있는 집- 원기둥
그보다 낮은 집이나 일반 살림 집 - 네모 기둥
특별한 의미 부여 - 팔각 기둥. 육모 기둥
육모기둥 - 정자에서 흔히 사용. ‘6’이 물을 상징하는 숫자. 정자 옆 연못과 조화를 꾀하려는 뜻
가구부 : 보, 대공, 도리이다. 공포 위부터 가구부이다.
보-대들보라고 부르는 대량, 그 위에 마루보(중량)이 올라 간다.
중량 위에 대공이 놓이고, 보의 양 끝 위와 대공 위에 여러 개의 도리가 직각 방향
가장 간단한 구조: 도리가 3인 3량 집 (대개 행랑이나 부속체)
최소 5량 이상으로 짓는다.
사찰 법당- 7량이 기본
궁궐- 9량 집도 종종 있다.
* 화령전
조선 시대에는 돌아가신 선왕의 위패를 종묘에 모셨지만, 그와 별도로 선왕의 초상화를 따로 모셔두고 예를 올리는 것이 습관화 되었다. 종묘 제례와 달리 영전에서는 초상화의 주인공에게 생전과 동일한 형식으로 예를 표했다.
종묘가 선왕의 혼령을 모셔놓고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라면 영전은 선왕이 생존해 있던 때를 그리워하며 초상화를 모시는 곳이다.
이곳 화령전의 특이한 점은 화려한 당가 형식 (닫집)으로 하지 않고, 합자 형식으로 한 것이다. 이는 정조가 검소하게 생활했던 뜻을 쫓아서 한 것이다. 두 번째는 정당 뒤편으로 가면 기단 한가운데에 커다란 아궁이, 좌우에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한 네모난 홈이 있다. 이것은 실내에 온돌을 설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실내 뒤편에 합자를 모신 1칸 크기에만 구들을 설치했다. 어진을 봉안한 부분에만 훈기가 유지되도록 바닥 아래 구들을 놓았다. 이는 살아있는 것처럼 모시기 위한 것이다.
정조의 묘호는 정종이었으나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 황제가 광무 3년 1899에 사도세자를 장조로 높이고 정종 역시 정조라 칭했다.
이 밖에 수원화성에 대해 더 읽을 만한 책으로는
-꿈의 문화유산 화성/ 유봉학, 신구문화사
-18세기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발언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한영우, 효형 출판
-시대를 담는 그릇/ 김봉렬, 이상 건축
-정조의 화성 건설/ 최용규, 일지사
-원행을묘정리의궤/ 수원시
-수정 국역 화성성역의궤/ 경기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