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향토사박물관

안산의 지명 변천사

박영희 2010. 8. 25. 00:24

〔 안산의 역사 1.-안산의 지명 변천사 〕

안산은 원래 고구려의 장항구현(獐項口縣) 또는 고사야홀차현(古斯也忽次縣)으로 불렸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안산의 옛이름이다. 이는 안산지역은 장수왕 63년 (475년)에 고구려로 복속되었다가 이후 백제 성왕 29년 (551년)에는 다시 백제 영토로, 그 2년 뒤에 다시 신라가 이곳을 정복할 때까지 76년간 고구려의 지방행정조직으로 편재되었다.

신라 진덕왕이 장구현으로 고쳤으며 신문왕 때 (757년) 장구군으로 승격되었다. 고려 초기에 안산현(安山縣) , 현종 9년에(1018)에 수주(水州)-현 수원의 속현으로 되었다. 충렬왕 34년 (1308)에 덕종, 정종, 문종이 탄생한 명예로운 고을이라하여 안산군으로 승격되었고, 이후 지사(知事)의 다스림을 받았다. (덕종, 정종), 문종이 안산에서 탄생하게 된 배경은 거란의 2차 침략과 관계가 있다. 고려는 강조가 흥화진에서 잘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고 만다. 그 후 개경이 함락되자 현종(1009~1031)은 전라도 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는데, 몽진 도중에 공주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현종은 고달프고 힘든 피난길에서 당시 공주절도사였던 김은부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김은부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다. 김은부는 그의 큰 딸에게 어의를 지어 현종에게 바쳤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중에 그 딸이 왕비가 되니, 그녀가 바로 원성왕후이다. 그녀는 훗날 덕종 (9대)과 정종(10대)를 낳게 된다. 또한 그의 두 딸들 역시 현종의 비가 되어 원혜왕후, 원평왕후가 된다. 그리고 원혜왕후는 문종 (11대)를 낳게 된다. 이로써 안산 김씨는 고려 현종에서 문종 대에 이르는 4대 50여 년의 세월을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다.

덕종의 탄신일 응천절, 정종의 탄신일 장령절, 문종의 탄신일 천장절 궁중 잔치 때는 안산의 부로들이 개경의 왕성에 초대받았다. 안산에서도 열흘이 넘게 잔치가 계속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이 건국되고 1394년 (태조 3) 그대로 경기좌도에 예속되었고 1413년 (태종 13) 8도제의 시행에 따라 좌우도의 구분없이 경기도에 예속 안산군으로 소속되어 군수가 파견되었다.

안산이란 지명 외에 세조때부터는 연성이라고도 흔히 불리었는데 이는 세조 9년 (1463) 문신이며 농학자인 강희맹이 중추원부사로 진헌부사가 되어 명나라 남경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항주의 전당강에서 자라는 연꽃인 전당홍의 씨와 뿌리를 가지고 와서 안산 관곡지에 시험 재배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뒤부터는 안산의 별호를 연성이라고 했다고 안산군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강희맹의 호는 사숙재 (세종 6년, 1424_성종 14년 1483년)로 조선 왕조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6대에 걸쳐 봉사하며 살았다. 그는 작은 아버지 강순덕의 양자가 되었다. 그래서 이숙번의 외손자가 된다. 이숙번은 안산군수로서 태종 이방원을 도와 여러 차례 정란을 승리로 이끌어 군호를 받고 일등원훈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안산 사람들로 조직된 군사를 구성하여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현재 이숙번의 묘는 물왕저수지 가는 길에 있다. 이러한 외할아버지 이숙번에게 강희맹은 넓은 장토를 받았다. 강희맹의 부인은 또한 안산 출신 순흥인 안숭효의 딸이다. 그는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 안산가까이서 농사일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60세로 세상을 뜬 뒤 안산에 묻혔다.

그의 가계는 당대의 명문가였다. 강희맹의 부친인 강석덕은 벼슬이 대사헌, 지돈령부사에 이르렀는데. 그는 세종과는 동서간이었다. 소헌왕후 심씨는 강희맹에게는 이모가 된다. 또한 형은 강희안으로 세종의 한글 창제를 찬성한 집현전의 여덟 학사 중 한명이다. 정인지 등과 훈민정음 해레편을 지었다. 또한 용비어천가 주석을 완성하기도 햇다. 그림은 고사관수도에서 그의 깨끗하고 초탈한 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시. 그림. 글씨에 모두 능하여 삼절로 추앙받았다. 하지먄 세상에 내놓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전하는 작품이 많지 않다.

연성으로 불렸다고 추정할 수 있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정종 2년 안산김씨인 김정경이 ‘박포의 난’ (방간의 난,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좌명공신에 올라 연성군에 봉군되었던 점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연성으로 불리운 것으로 추정된다.)

연성과 관련하여 안산이 가장 영광스럽게 부각된 것은 1797년 (정조 21) 화성에 모신 정조 임금의 아버지인 사도세자 (장조)의 능인 현륭원 행행길에 정조 임금의 어가가 하룻밤 안산별궁에 묵었다. 이 때 정조 임금은 “소반 같은 땅 모양 일만 봉우리 연꽃과 같고

물고기라도 전당강과는 비교치 말라.

천하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 안산이라 했는데

해마다 벼까지 잘 여물어 풍년이라네‘

라는 어제시를 내렸다. 또한 어가아 거쳐온 인근 과천, 시흥 등 10개 읍의 선비들에게 과거를 베풍었다. 이 날 어필로 직접 써서 내린 시제 역시 연성과 관련이 있는 제목으로 “중국 남경에 갔던 사신이 항주의 전당강에서 연꽃 종자를 가져와 군의 이름을 연성이라 하였네”였다.

1895년 고종 32년 ‘지방제도개혁에 관한 건’을 통해 23부제로 개편할 때 안산군은 인천부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3월에는 조선총독부경기도령 제 3호 “면의 명칭 및 경계 확정”으로 안산,과천 시흥은 시흥군이란 명칭으로 통합되었다. 이리하여 고려 초기인 940년부터 1914년까지 975년간 계속 유지되었던 ‘안산’의 명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1976년 건설부가 서울근교에 신공업도시 건설의 적지로 반월지역을 선정함으로써 새로운 공업도시가 탄생하였다. 정부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반월은 공업지역이면서도 그림 같은 전원도시가 될 것이었다. 우리 나라가 최초로 시도한 인공계획도시로서 당초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도 캔버라 시를 모델로 삼았다. 새로운 도시 터전으로 반월을 꼽은 것은 이곳이 서울에서 1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이고 비탈이 급하지 않은 구릉지대이므로 아까운 농경지를 많이 밀어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1977년‘경기도 반월도시개발지원사업소’가 1979년 ‘경기도 반월지구출장소’로 승격되었다. 이후 경기도 반월지구출장소는 계속적인 도시 개발과 성장을 계속하여 시로 승격할 요건을 갖추었다. 시의 명칭은 ‘반월지구출장소’의 이름을 따서 ‘반월시’로 명명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안산’이란 이름을 되찾아 1986년 1월 1일부터 안산시로 병명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고려초기부터 조선왕조를 거쳐 975년간 지켜왔던 이름을 되찾은지 이제 23년째이고 2010년이면 ‘안산’이란 이름은 1000년을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