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의 대표적인 역사인물을 꼽으라 하면 성호 이익선생이다.
성호 선생은 팔십 평생을 안산에 기거하면서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성학이다.
그는 당대 엘리트와는 달리 벼슬에 나가지 않고 농사를 직접 지으면서 애민정신을 실천한 사상가로
알려졌다.
빈익빈, 부익부 세상을 고쳐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자 했던 그의 사상은
특별히 끝없는 경쟁속에 불공정과 불안한 삶을 마주해야하는 작금의 현실에 시사 하는 바 크다.
시대변화의 가치를 세우고 민생개혁 사상을 펼쳤던 ‘성호장(星湖莊)’이 있었던 안산 첨성리,
이번 답사는 성호선생 자취를 찾아 ‘안산 성호길’을 이어보자는 것이었다.
일동 성호선생 묘소를 먼저 찾았다.
문인석이나 신도비가 없어서 인지 묘소는 참으로 소박하고 정갈했고 평지에 올려 마을 언덕처럼
평온하였다.
일동에서 태어나 평생을 사신 염희섭 선생의 말에 의하면 소실 적에는 이곳에 소를 메어놓고
늘 지나 다니던 평범한 묘지였다고 한다.
과거 일동의 지명이던 이 첨성리가 광주군, 안산군, 화성군 3개군면 경계를 이루어 학자들 간에도
광주 첨성리와 안산 첨성리를 서로 혼돈하여 성호 묘소가 광주군 등으로 얘기되기도 하였는데,
묘소는 분명히 안산 첨성리 쪽에 있었고 바로 그 바깥쪽이 광주군 경계였다고 한다.
성호가 학문을 연구하고 묻힌 곳은 예나 지금이나 '안산 첨성리'였다는 것이다.
염희섭 선생을 따라 이미 주택가로 변한 마을 안쪽을 돌아 성호장터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 나섰다.
바다에 가까운 이곳에 ‘성호’(星湖)라는 호수가 있었고 그의 호도 여기에 연유된 것이며,
그의 전장(田莊)도 ‘성호장’이라 일컬어졌다.
어쩌면 성호선생과 뭇 지인들이 그를 찾아 거닐었을 마을길을 타고
염희섭 선생이 어렸을 때부터 구전으로 ‘성호장터’라고 들어왔던 일동 744번지 일대에 도착했다.
안산 성호장터를 확증하고 이를 유지 못한 것은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실학은 수많은 지식인들이 안산 성호와 접하고 꽃피웠던 학문이었다.
성호장터에는 수 천 권의 책을 가지고 있어 실지 지식인들이 왕래하였고 당시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학(西學)에 학문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통하여 서양문물에 직접 접하면서 새로운 세계관과
역사의식을 확대, 심화시킬 수 있었다.
성호장터가 있었던 첨성리는 별빛과 호수가 아름다운 고장으로 당대 문인들의 시회(詩)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단원아집’(檀園雅集)은 1753년 안산 단원에서 이재덕, 이현환등 여주이씨 인물과 부곡동 강세황,
권 매 등이 참가해 이때 지은 시 29수를 모아 놓은 시집으로 ‘우연히 단원에 모여
‘빈산엔 사람은 없지만 계곡은 흐르고 꽃은 피었네’로 운을 나누어 각각 읊은 것이다
‘(偶集檀園 以空山無人水流花開 分韻各賦)
여기서 특이한 것은 ‘단원’이라는 고유지명이 나온다.
김홍도 호로 알고 있는 ‘단원’이 안산 어느 곳의 ‘지명’으로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첨성리는 ‘점성리’, ‘탑골’, ‘성촌’, ‘섬곡’ 등의 지명으로 혼합해서 불렸는데,
성호의 종손 이현환과 함께 어울렸던 이재덕의 ‘의추재 기문’(依楸齋記)을 보면,
당시 이 지역의 경관과 풍치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의추재’는 집 바로 앞에 연꽃을 심은 연못[蓮塘]을 두고, 수십 보 뒤에는 부모님의 선영이 있으며,
눈앞에 하포(蝦浦)의 조수 풍광을 받아들이고, 등 뒤로는 수리산의 언덕 자락을 등지고 있다 하였다.
특히 이 집의 오른편으로는 ‘단구’(丹丘)를, 왼편으로는 ‘도산’(陶山)을 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도’(道峯)을 바라볼 수 있다 한다.
이현환이 새로 집을 짓고 샹량을 기념하여 쓴 글〈섬고신사상량문 蟾皐新舍上樑文〉에
그의 집은 십대(十代)의 선영과 널찍한 백하白蝦(그 부근에 蝦浦가 있었음) 뜰이 보이는 곳으로서,
오른쪽으로는 가산(可山)의 풍경을 끌어당기고 왼쪽으로는 수리산의 자락을 마주하고 있다고 적었다.
이어, 남쪽으로는 도봉(道峯)의 푸른 숲을,
동쪽으로는 지항(智巷: 계향골)의 임목(林木)을 잇닿은 채,
구랑동(九郞洞: 구룡골)의 월색(月色)과 팔곡촌(八谷村: 팔곡리)의 연광(烟光)을 조망할 수 있으며,
모래사장이 있는 시냇가를 따라 같은 마을에 8, 9채가 모여 산다고 하였다.
과거의 경관과 지명을 파노라마처럼 떠올릴만한 문헌들이다.
성호장터를 중심으로 좌우로 ‘단구’와 ‘도당’, 남쪽으로 ‘도봉’... 머릿속에 맴도는 지명들을 뒤로하고
우린 ‘첨성리’가 내려다보이는 산길을 올라 화림선원으로 가면서 과거 당제를 지냈다는
큰 아름드리 소나무가 서 있는 이곳이 그 ‘도산’은 아닐지 생각해봤다.
화림선원은 계향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약수암’으로 전해졌던 화림선원에서 유물이나 유적을 찾을 수 없었고
경내에 약수가 있어 ‘점섬 약수암’의 갈증을 달래야만 했다.
골프장 철책선을 한없이 따라 정상에 오르니 눈앞에 낯설기 만한 골프장 전경과 가사미산,
안산의 일경이 훤히 펼쳐졌다.
이곳에 ‘성태산 정상’이라는 말목이 세워져 있는데 이 봉우리는 ‘계향산’이고
청룡사쪽 성태산성 터가 있는 정상이 ‘성태산’이라는 것이 염희섭 선생의 얘기다.
급격한 도시개발의 잔영들일까. 안산 지경의 지명들은 도처에 사라지고 잘못 불러지고 있다 한다.
현재 지도에 표기된 일동 중앙병원에서 반월로 넘어가는 ‘점성고개’도 염희섭 선생 말에 의하면
부곡리에서 점성리로 들어오는 고개가 바로 ‘점성고개’고, 중앙병원쪽은 ‘수리실 고개’로 불렸다고 한다.
조선시대 안산읍지에는 광주(廣州)로 가는 행로로 장명현(長命峴, 獐鳴峴)이 선명히 나오고
그 ‘장명현’은 점성리 뒷산에 있다 했는데,
그렇다면 ‘장명현’은 과연 어딘가?
도시 성장과 함께 역사와 문화전통에 대한 일상의 관심이 멀어지면서
우린 스스로 미로에 갇힌 채 또 다른 정신의 장벽에 싸여 있는 것은 아닐까.
성호기념관이 일동 한복판에 우뚝 서있고 지난주엔 성호문화제가 연례행사로 개최되었다.
성호 사상의 발현지인 ‘성호장터’는 이 일대 경관과 한 몸이 되어
그의 감응과 정신사를 이루어왔던 역사현장이다.
성호의 고향이 안산 일진대, 그가 평생을 기거한 ‘성호장터’는 내버려두고 또한 주변경관들도
제대로 된 고증도 없이 앙상한 뼈대만으로 성호정신을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산천에 뿌려졌을 유물과 유적들이 삶의 발길에 무뎌지고 길을 잃으면서
안산 성호길에 ‘성호’가 없다는 것을 새삼 느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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