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의 역사

조선 시대의 안산

박영희 2010. 8. 12. 23:43

7. 안산의 교통과 통신

 

(1) 도로와 역


조선 시대의 사회·경제적 구조는 상공업을 천시하여 교통망과 통신시설이 대단히 미비하였다. 교통의 경우 육상운송을 위한 역(驛)·원(院)과 해·수운을 위한 조운제가 시행되었고 통신을 위해서 봉수제도 실시되었으나 어느것이나 사회·경제적 측면보다는 행정·군사상의 중요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도로 길이는 주척(周尺;6치 6푼)을 기준으로 6척을 1보(步), 360보를 1리, 30리를 1식(息;사<舍>)으로 정했으며 경복궁 앞에 원표(元標)를 세우고 10리마다 소후, 30리마다 대후를 세워 이수(里數)와 지명을 표기했다.


육상교통의 중요 기관으로는 역과 원이 있는데 역은 간선도로를 따라 대략 30리마다 역마와 역정을 두어 관청 공문의 전달, 공무여행자의 숙식과 마필의 제공, 진상과 공납물의 수송을 담당케 하였다. 각 역에서는 역장·역리·역졸 등의 관리를 두었으며, 수개 내지 수십 개의 역을 하나의 도(道)로 하여 찰방(종6품)·역승(종9품)이나 중요한 도선소에는 도승(渡丞)이 있어 역(驛)이나 도(渡;나루터) 등을 관장하였다.

 

 찰방이나 역승·도승은 무록관이었으며 취재115)에 의해 선발되는 서리들이 임용되었다. 역은 이용도와 중요성에 따라 대·중·소로 구분되어 조선 초기에는 한양에서 개성·죽산·직산·포천까지를 대로로 하고, 한양에서 양근, 죽산에서 상주, 직천에서 성주, 직산에서 전주, 개성부에서 중화, 포천에서 회양까지를 중로로 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소로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가 되면서 이를 대폭 개편하여 대로는 경기의 12역, 중로는 경기 9역, 충청 24역, 전라 4역, 경상 5역, 강원 6역, 황해 11역, 평안 13역, 함경 17역으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소로로 규정하였다. 각 역에는 공수전(公須田)으로 대로 20결, 중로 15결, 소로 5결의 토지가 지급되었다. 경기도에는 영서·양재·평구·중림·경안·도원의 6개 도의 관할하에 대로 12역, 중로 9역, 소로 32역으로 도합 53역이 있었다. 이 중 안산 및 금천·과천을 중심으로 설치한 역은 다음과 같다(대·중·소는 역의 크기).

  • 중림도(역승 뒤에 찰방)의 7개 역
    인천 중림(소), 인천 경신(소), 금천 반유(소), 안산 석곡(소), 양천 금륜
    (소), 통진 중생(소), 양천 남산(소)
  • 양재도(찰방)의 14개 역
    과천 양재(대), 광주 낙생(대), 용인 구흥(대), 용인 금령(중), 죽산 좌찬
    (중), 죽산 분행(중), 음죽 무극(중), 안성 강복(소), 양성 가천(중), 남양
    해문(소), 수원 청호(중), 수원 장족(소), 수원 동화(소), 수원 영화(소)

     

     

    (2) 원(院)
    한편 지방의 요로에는 공용여행자의 숙식을 위한 원(院)이 설치되었는데, 고관들의 경우는 지방 관아에 부설된 관(객사)을 이용하였고 사적인 여행자는 점(店) 또는 주막(酒幕)을 이용하였다. 각 원에는 인근 주민 중에서 원주(院主)를 선발하여 원의 유지를 위한 원주전(院主田)을 관리케 하여 대로에는 1결 35부, 중로에는 90부, 소로에는 45부의 토지가 지급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전국에 1310개의 원이 있었으며, 원은 역과 함께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원은 임진왜란 이후 거의 소멸되고 사설인 주막이나 점막에서 이를 대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안산군 및 금천현·과천현에 설치된 역(驛)·원(院)·진(津)·참(站)·점막 등은 다음과 같다.

     

    1) 안산군


     

  • 석곡역(石谷驛):군의 치소에서 서쪽 7리 지점에 있었고, 인천의 중림도
    에 속하였으며 역마 8필, 노비 33명이 있었다.
  • 쌍록원(雙鹿院):군의 치소(시흥군 수암리)에서 남쪽으로 5리 되는 곳.
  • 점막(店幕):초산면 광석리에 있는데, 읍에서 10리 지점.

    2) 금천현

  • 반유역:현에서 북쪽으로 10리 떨어진 문교리에 있었으며, 중림도에 속
    하며 역촌은 11호, 역마는 7필, 마위전은 12결 11부 7속.
  • 관음원:현에서 서쪽 3리 지점.
  • 양화도:현의 북쪽에 있고 도승(渡丞)이 있음.
  • 양화도원:양화도 남쪽 언덕에 있음.

     

    3) 과천현

  • 양재역:현의 치소에서 동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본도인 양재도를 주관하며 종6품의 찰방 1명이 있어 예하의 낙생·구흥·금령·좌찬·분행·무극·강복·가천·청호·장족·동화·해문의 12개 역이 있으며, 뒤에 영화도(迎華道)로 개칭하였다.
  • 흑석참:현의 북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좌도 수운 판관에 소속.
  • 노량원:현의 북쪽 20리 노량진 남쪽에 있었음.
  • 인덕원:현의 남쪽 15리 지점에 있었음.
  • 미륵원:현의 북쪽 15리 지점에 있었음.
  • 오금원:현의 북쪽 10리 지점에 있었음.
  • 요광원:현의 북쪽 5리 지점에 있었음.
  • 동작진:현에서 북쪽 18리에 있는데, 나루에는 모로리탄(毛老里灘)과 기도(碁島)가 있었다.
  • 노량도:현에서 북쪽으로 20리에 있는데 전에는 흑석진이라 불렀다.


    (3) 봉수제도                                                                                                                              봉수제도(熢燧制度)는 변방의 다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오로지 군사적 목적으로만 사용하였다. 봉수대〔煙臺〕는 수십 리마다 눈에 잘띄는 산꼭대기에 두어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써 신호를 보냈다. 평상시에는 횃불 1개, 적이 나타나면 횃불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횃불 3개, 국경을 침범하면 횃불 4개, 전투가 벌어지면 횃불 5개로 신호하였다. 일기가 불순하여 시계가 나쁠 경우에는 봉수군이 직접 말을 달려 보고하였다. 매일의 상황은 수직 금군이 병조에 보고하고, 병조는 다음날 승정원에 보고했는데, 급한 변사가 있을 때는 한밤중에도 보고하였다.


  • 봉수의 간선은 직봉(直烽)이라 하여 동북은 경흥, 동남은 동래, 서북의 내륙 지방은 강계, 해안 지방으로는 의주, 서남은 순천을 기점으로 하여 서울의 목멱산(木覓山;남산)을 종착점으로 하였다. 이외에 간봉(間烽)이라는 보조선이 있었는데, 이는 전선의 초소로부터 직봉선의 사이사이에 중간 역할을 하는 것이거나, 전선에서 직접 본진이나 본읍에 이르는 단거리의 것이었다. 각 봉수대에 소속되는 인원은 남산에는 군사 4명과 오원(伍員) 2명, 연해와 변경에는 군사 10명과 오장(伍長) 2명, 기타 내륙 지방에는 군사 6명과 오장 2명을 배속했다. 이들은 주로 인근 거주자 중에서 선발했는데, 봉군(烽軍)은 천역에 속하여 국가에 죄를 지었을 경우에 봉졸이 될 수도 있었다. 「대전회통」에 따르면 세종 때에 제도화하였으며 거짓 봉화나 방화·실화에 의한 오인을 막기 위해 처벌을 강화하였다. 즉 봉화대에 표지나 기 등을 세워 이를 경계로 100보 이내에서 허위 봉화든 단순 방화를 막론하고 병조에서 단속하였고, 100보 밖에서 일어나면 해당 진영에서 담당하였는데, 이들은 대개 사형에 처하였다. 또한 봉화대 부근에서는 무당이나 토속신앙에 의한 잡신 제사를 엄금하였는데, 이것 또한 실화에 의한 오인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조선 시대의 직봉·간봉의 조직은 표 1-13과 같다.

    표 1-13 조선시대의직봉ㆍ간봉조직(「만기요람」)

    출발점
    종착점
    직봉 .
    간봉
    1거선
    함경도
    경흥서수라보
    우암
    한양
    목멱산
    120
       
    60
    2거선
    경상도
    동래
    한양
    목멱산
    40
    23
    3거선
    강계
    만포진여둔대
    한양
    목멱산
    78
    22
    4거선
    의주
    고정주
    한양
    목멱산
    71
        
    35
    5거선
    순천
    방답진
    한양
    목멱산
    51
    34
    380
    27

  • 이에서 보면 안산은 제5거선 선상에 있게 된다. 즉 전라도 순천 방답진에서 출발한 신호는 경기도에 들어와 양성·수원·남양의 해운산을 거처 안산의 무응고리(無應古里)·오질애(烏叱哀;오이도)에 이르며, 이는 다시 부평을 지나 양천 개화산에서 한양 목멱산에 전달된다. 안산에는 “군의 서쪽에 오질애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무응고리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인천의 성산에 응한다.

  •  

  • 무응고리는 군의 서쪽에 있으며 남으로는 남양 해운산에 응한다.”라고 하여 2개의 봉수대가 있음을 알 수 있다.116)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무응고리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고 있는데, 무응고리 봉수가 「여지도서」에서 보이는 정왕산(征往山) 봉수라고 하는 견해도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분명치 않다. 무응고리를 현 군자면 정왕리 봉우재의 봉화산으로 비정하는 견해와117) 오질애와 해운산 간의 도서 또는 해안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남상긍(안양전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