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옛길 첫번째 탐사, 탄탄대로를 막아버린 ‘장벽과 무관심’을 건너다.
어떤 의미일까? 안산을 품고 있었던 지경과 옛 정취를 느껴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었다.
안산1대학에 모여 청룡사를 통해 성태산을 올라갔다.
성태산은 놀랍게도 별망성에서 시화호를 조망했듯이 안산 시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산능성이였다. 성태산이 알려진데는 안산의 전략적 요충지인 성태산성 존재를 비문을 통해
확인하면서 부터라고 한다.
그 비문에서 성태산성을 찾아낸 주인공이 오늘 답사를 인도하신 전 안산문화원장 유천형 선생님이다.
성태산성은 해안가의 주요지점과 주요 교통로로 안산의 전략적 차원의 일환으로 축성된 산성으로
추측하고 있다.
2000년 지표조사 당시 만해도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신라시대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더 많은 유물들이 산성내부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안산시가 10년간 방치하면서 성곽의 흔적들은 흙더미에 묻혀버렸으며,
망루가 있었을 산정은 근린체육시설단지로 변해버렸다.
안타까움으로 성벽 주변을 맴돌아봤지만 무책임한 문화행정과 역사의식 실종을 질타하는
유천형 선생의 분노에 몸들 바를 몰랐다.
시화호를 에워싼 성곡산성과 별망성이 뼈대만 남긴 채 공단 ‘뒷동산’이 되어 버린 마당에
안산 원경을 확보하고 시민들 품에 있는 성태산성과 반월 터미산성은
안산으로선 매우 상징적이고 귀중한 문화재가 아닐 수 없다.
허물어져 버린 성곽과 내동기 쳐버려진 성지를 걸어가면서 성태산성의 발굴과 복원을
서둘러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반월에서 일동으로 넘어오는 나지막한 고개 길, ‘점성고개’는 퍽퍽했던 답사팀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한 공간이었다.
길과 고개는 그저 지나다니는‘통로’가 아니라 마을들을 살아 숨쉬는 핏줄처럼 연결하고
꿈결 같은 고향길 정취를 만들어 주는구나.
마치 금방이라도 옛 선인들이 나귀를 타고 비키라고 할 것 같은 아름답고 옛스러운 고갯길에서
모두들 한참을 쉬었다.
이 길을 따라 당장 반월이나 일동으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을 고쳐 잡고 다시 산길로 나섰다.
이번 산행은 현재‘너구리봉’이라 이름 지워진‘시루봉’까지였다.
‘안산 서호’(安山 西湖)라는 말이 있다. 과거 바다에 떠있는 안산을‘서호’(西湖)라고 불리었다.
이곳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서쪽 멀리 별망성과 화성쪽 남양반도가 교차되어 있어
시화호는 갇힌 수면이 되고 고잔 도시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온통 바다와 갯벌안산 땅은 거대한 호수로 내려다 보였다.
단원 김홍도의 소실 적 호가 바로‘서호’였다. 또한 서호는 도교적 의미의‘신천지’로 이해되기도 한다.
김홍도의 안산사랑은 이곳‘안산 서호’에서 불세출 조선미술의 명작 풍속화를 낳았을 것 또한
생각해봄직하다.
지금은 호수도 뻘도 남아있지 않고, 바로 턱밑에 거대한 골프장이 낮선 이국풍경을 연출하고 있지만
이 어느 지점에서 위대한 안산 문화 예술의 향연이 펼쳐졌지 않았을까?
‘바지고개’는 안양, 군포, 반월에서 안산으로 들어오는 옛날 ‘대로길’ 이었다.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장명현’으로 비정된다.
탁 트인 반월저수지 쪽 군포, 경기 남부내륙 지경이 훤하게 보이고 바로 이 고개만 넘으면
‘안산 서호’로 들어서게 된다.
바지고개란 지명 해석 또한 재미있다.
산적들이 많아 갓과 도포를 벗어버리고 바지만 입고 내달렸던 고개라 해서,
어염과 물산으로 풍부했던 안산을 찾아 ‘머리받이’와 ‘지게받이’로 물건들을 이고 실어 날렸던
고개라 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둘 다 해학과 서민들 애환이 물씬 묻어나는 얘기들이다.
바지고개를 지나면 바로 부곡동 월피동을 지나 시흥과 부천 김포 인천까지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1500년이 넘게 다니던 바지고개 길은 지금은 두꺼운 침목더미로 높게 장벽을 쳐서 길을 끊어버렸다.
안산 제일컨트리 클럽 골프장으로 바로 관통하기 때문이란다.
문화재뿐만 아니라 옛길은 살아있는 역사와 다름없다.
이렇게 무참히 길을 막아버린 그 역사의 단절을 탄식하면서
우린 가빠른 ‘시루봉’을 힘겹게 올라 돌아가야만 했다.
정재초등학교로 내려오는 가을 길은 햇살 그윽한 자연의 넉넉함을 주었다.
그 산길 어귀 독립운동가 유익수 선생 묘가 있다. 유익수 선생은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1919년 3월 30일 안산 지역의 지도자들과 함께 수암면 비석거리에서
인근 18개 동리 2천 여명의 주민들을 인솔하고 선두에 서서
읍내의 향교․면사무소․보통학교 등을 돌면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음날에도 반월면(半月面) 장날을 이용하여 주민 600여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수백명이 만세시위를 벌린 인근지역인 시흥군자, 광명 노온사, 대부동 등에는 모두 기념비가 있는데
비해 수암 2천명이 시위한 역사의 현장인 수암동에는 기념비하나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청룡사로부터 유익수 선생 묘소에 이르기 까지 안산을 아우르는 역사길은
그 야말로 시민들의 애틋한 관심과 손길이 닿아야만 비로소 선양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정재(靜齋)는 진주유씨 18世 유명현(柳命賢)의 아호이다.
예조 공조 이조의 판서를 두루 지낸 인물로 그가 살던 곳을 ‘정재골’이라 불렀다.
그의 후손들은 18세기부터 안산의 문화예술을 부흥시켜왔고 근대에 들어와 교육에 힘썼다.
1967년에 이르러 안산초등학교가 교실부족으로 힘들어하자 정재골의 땅을 학교용지로 사용하라고
나라에 기부하였고, 이를 기리기 위하여 학교이름도 정재초등학교라 하였다.
학교교정을 들여다보니 이순신장군의 동상이 서있다.
이순신 장군도 중요하지만 학교 설립에 정신적 바탕이 된 정재선생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역발전에 공헌한 옛 현인(賢人)들을 기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청문당을 찾아나섰다. 길 잘못 들어선 이방인들처럼 청문당 길은 밀집된 공장지대를 헤집고
흙먼지 바람을 피해가면서 찾아야만 했다.
그래도 이번엔 유천형 선생이 계셔서 자신있게(?) 따라나섰다.
청문당은 조선후기 안산문예부흥운동의 발상지로서 해암(海巖) 유경종(柳慶種) 선생이 열였던
안산문화예술전당으로 조선4대 서고인 만권루가 있었다.
임금이 하사한 넓은 사패지와 안산 바닷가 어염권을 기반으로 이곳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조선후기 기호남인들의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 많은 실학자들의 저작과 문예활동의
지적기반을 다졌던 기념비적 장소였다.
순암 안정복의 동사강목도 청문당의 자료와 서책을 이용하여 가능했으며
안산이 낳은 조선예원의 총수 강세황과 김홍도 역시도 해암 선생의 지원과 관심이 없었다면
무망한 일이었을 거라고 유천형 선생은 말씀하셨다.
정작 조선 지식인의 대부 격인 해암선생의 사천 수에 달하는 한시(漢詩)들은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서고에 먼지가 쌓여있다 하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청문당 뒤뜰 곧게 뻗은 거대한 모과나무를 보면서 우린 해암선생을 떠올렸지만,
누군가 먼 길을 찾아 이곳에 왔을 때
그 정신 한 켠 이라도 제대로 얹어볼 수 있을지 훵한 청문당 모습에 사실 걱정이 앞선다.
그래도 그 유지를 펼쳐보고자 하는 분을 쫒아 그 주변을 살피면서
과거 청문당 연지(蓮池)와 현정(玄亭)등을 찾아다녀본 것은 위안이었다.
과거 기억과 장소는 현재의 그 어떤 갈급함으로 더욱 가치를 발할 기회의 장으로 나아갈 것이다.
산길 6km을 쉼 없이 걸어 이곳에 모였던 우리들의 갈증과
이제 외형적 성장을 대체할 삶의 질 문제제기, 그리고 이를 채워나갈 생명문화의 뜨거운 요구들,
이 모든 것을 아우러나갈 안산의 새로운 문화예술 부흥의 장으로 말이다.
청문당에 오기 전에 잠시 들렀던 ‘만수동천’(萬樹洞天)길 경성당.
고풍스러운 사랑채 주련(柱聯)문구는 이 옛길답사의 뜻을 새겨볼 수 있는
어쩌면 우리 안산이 나아갈 길을 선명하게 제시해주는 글이었다.
“宣廟賜牌之局寸土勿輿於他人
선조께서 내려주신 땅, 한 줌이라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
“星祖定礎之基十世相傳于後裔
성조께서 터를 잡으신 곳이니 후세까지 보전해 나가라.”
(성조(‘星祖’)는 진주 유씨 16世 유시회(柳時會)를 말함. 그의 호(號)가 성산(星山)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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