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도

[스크랩] ‘풍도(豊島)’는 풍도‘(楓島)’다. (1)

박영희 2010. 10. 14. 23:13

풍도(豊島)’는 풍도‘(楓島)’. (1)

 

 

풍도원경                                                                                                        Ⓒ 안산역사

 

풍도의 역사

 

  행정구역으로 안산시 단원구에 소속된 ‘풍도’는 안산 땅이지만 안산에서는 여객선을 탈 수가 없고 인천에서 하루 한차례 운행하는 정기여객선을 타고 2시간 남짓 가야 하는 곳이다. 해안 전체가 자갈밭으로 이루어져 있어 서해의 다른 섬과는 달리 모래사장과 갯벌이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산 하나가 바다위에 떠 있는 듯한 형상을 한 풍도는 평지가 없어 논을 일굴 만한 땅과 물이 없고, 산비탈에 밭만 조금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람이 살기에는 부적합 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풍도주민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겨울철에는 굴이 생산되는 인근에 있는 도리도로 집단 이주생활을 해 왔다. 이러한 생활은 일반사람들에게는 흥미로운 생활상으로 비추어졌지만 정작 당사자인 풍도 주민들은 삶의 몸부림이었다.

 

  이렇게 한곳에 정주하며 살아가기 어려운 섬인데도 불구하고 수백년간 이곳을 지켜온 이유는 무엇일까?

풍도는 서해 경기만 연안의 끝 섬이므로 예부터 군사, 해상교통 요충지였다. 현재 풍도에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두 그루는 백제를 치기 위해 당나라 군사를 싣고 지나가던 소정방이 들러 심었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특히 고려 때부터는 중국으로 오가는 항로(航路)상에 위치한 까닭에 역사의 기록이 등장한다. 『고려사』기록에 의하면 1352년(공민왕 원년) 3월 “포왜사(捕倭使) 김휘남(金暉南)에게 명하여 전함 25척을 거느리고 왜적을 막도록 하였는데, 풍도(楓島)에 이르러 왜선 20척을 만나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왜구가 풍도 주변에 머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풍도지도(1872년)  풍도 앞뒤로 항로가 표시되있다 서양배가 머물렀다는 글이 보인다.    Ⓒ 안산역사 

 

조선 후기에는 풍도에 관한 기록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일성록(日省錄) 1826년(순조 26) 5월 11일조에는 풍도 수호별장감관(水護別將監官)이 서산 인근에서 표류한 15인을 보고한 일도 있었다. 조그마한 섬에 ‘별장’직책을 두었다는 것은 풍도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을 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현지에 남아있는 고문서로도 알 수 있다.

서해 남부지역에서 서울 쪽으로 진입하려면 반드시 풍도 앞바다를 거쳐야 했으며 이와 같은 이유로 풍도 인근에는 이양선(異樣船)이 자주 출몰하였다. 대부분 아시아에서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한 서구제국주의 세력의 상선, 함선 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66년 병인사옥(丙寅邪獄)으로 희생된 프랑스 신부에 대한 복수를 위해 우리나라를 침략한 프랑스함대의 최초로 목격된 곳이 풍도(楓島)였으며, 5년 뒤 1871년 4월 6일에는 대동강에서 불타버린 미국의 제네럴 셔먼호에 대한 보복을 위해 침략해 온 미국함대도 풍도에서 처음 목격되었다. 풍도앞바다는 요즈음도 경기만을 통해 인천과 평택, 당진을 오가는 수많은 대형 화물선과 수송선 및 어선들의 항로로 이용되고 있다. 풍도의 제일 높은 산봉우리는 174m로 후망산(堠望山)이라 불리며, 이곳에서는 지금도 경기만 항로상의 각종 선박을 감시할 수 있다. 산의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1845년 고후득에게 내린 풍도수호별장 전령              Ⓒ 안산역사 

 

  풍도는 옛부터 단풍나무가 많아 가을이면 섬 전체가 붉게 물들어 절경이어서 ‘풍도(楓島)’라고 불렸다. 지금도 해안을 따라서 단풍나무가 많다. 따라서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모든 우리나라 문헌에는 ‘楓島’라고 쓰였다. 고려 조선 1천년을 이어온 이름이다.

  그러나 청일전쟁이 발발되었을 때 우리문헌에는 ‘楓島’라 기록되었으나, 일본 문서에는 ‘豊島’로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豊島’라는 명칭은 일본에 많이 존재한다. 지명, 사람의 성씨( 姓氏)에도 등장하고 역사문헌에도 등장하는 이름으로 청일전쟁 당시 그들에게 익숙하였던 豊島’로 기록하였다. 이후 2차 갑오개혁을 통하여 8도제의 지방제도를 23부제로 개편하면서 우리나라 문헌에도 ‘豊島’로 쓰기 시작하였다. (계속)

 

 

 

 [왼쪽] 1891년 호구단자 '楓島'라 기록되었다. [오른쪽] 1895년 일본이 작성한 풍도해전 고승호격침보고서 '豊島'로 기록되었다.

 

 

 1896년 행정구역개편후 작성된 호적표부터 '豊島'로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출처 : 안산지역사연구모임
글쓴이 : 우리마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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