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5일 광복절. 남북의 대치와 주변열강들의 준동으로 한반도 긴장위험이 고조되고 있는 이때에 ‘광화문 현판식’에 몰입하고 있는 정부당국을 보는 마음이 영 씁쓸하다.
하기야 이 나라 정부와 정치권은 국민의 소리와 민중들 염원과는 달리 ‘간판’을 고쳐다는 일만 거듭해왔다.
나라의 주권이 백성들 손을 떠났던 경술국치 100년. 8.15광복과 전쟁, 남북분단으로 이어진 한국현대사의 질곡은 민족적 서광을 비추지 못한 채 고스란히 한반도 곳곳에 전쟁의 상처와 민중들 고통만을 아로새겨 왔다.
청일전쟁지역사 특강
구한말 일본군의 한반도 주둔과 조선 침략을 노골화한 청․일전쟁은 민족의 운명을 바꿔놓은 사건이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반도가 열강의 전쟁터로 원귀로 떠돌아 ‘전쟁의 흔적을 평화의 초석’으로 삼고자 지난 13일과 14일에 거쳐 청․일전쟁사에 대한 특강과 안산 풍도과 평택지역을 답사하는 <청․일전쟁 격전지 경기 서해연안평화기행>을 수행하였다.
풍도가는 배를 기다리며 선재도선창에서 기념촬영
청․일전쟁의 서곡이었던 ‘풍도해전지’를 찾는 안산 대부도 풍도뱃길은 늘 순탄치 않았다.
일본인들에게는 ‘빛나는 전승지’로 선양되고 있지만, 정작 우리들에겐 낯선 섬 풍도, 그래서 일까?
이방인들(?)을 쉬 접근치 안겠다는 듯이 짙은 해무와 비구름이 배를 선승한 우리들 마음을 무겁게 했다.
거기에 앞을 분간할 수 없는 폭우와 낙뢰까지 40여명의 시민답사팀의 1시간 바닷길은 ‘악천고투’였다.
풍도해전지 설명과 풍도해안에서 본 해전지, 수평선이 떠있는 좌측섬이 울도
풍도해전은 인천 서울과 경기만, 서남해를 잇는 주로 항로인 이 풍도 앞바다에서 주도면밀한 일본함대가
며칠간 매복해 있다가, 청나라 군함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침몰시킨 사건으로 구한말 동아시아 침략전쟁의
서막이었다. 단풍나무 숲길이 아름답게 펼쳐진 현재 풍도서쪽해안과 ‘울도’ 안쪽바다길이 그 해전의 격전지다. 어쩌면 당시 망루가 되었을 유난히 하얗게 빛낫던 풍도등대만이 그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쁜 기상여건으로 해전지를 찾아 오래 머물지도 울도 해안쪽으로 더 나아가지 못한채 풍도 해안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풍도에 잠시내려 답사
풍도는 마치 접시를 엎어놓은 듯한 형상으로 서해고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섬이다.
특히 단풍나무가 많아 가을이면 섬 전체가 붉게 물들일 정도로 단풍이 절경이어서 ‘풍도(楓島)’라고 불렸다. 우리 문헌에도 ‘풍도(楓島)’라고 쓰였으나 청일전쟁이 발발되며 일본 문서에는 ‘풍도(豐島)’로 기록되면서 현재도 그 이름으로 쓰고 있다. 이번 답사를 주도해주신 정진각 선생 얘기로는 ‘풍도(豐島)’라는 명칭은 일본에 지명, 성씨에 등장하고 역사문헌에도 많이 나와 청일전쟁 당시 그들에게 익숙했던 ‘풍도(豐島)’로 기록한 것이라 했다. 그게 맞다면 확실히 우린 ‘풍도의 이방인’이 아닐까.
풍도를 나오면서
풍도 앞바다는 서해의 요충지로서 경기만을 통해 인천과 평택, 당진을 오가는 수많은 대형 화물선과 수송선 및 어선들의 항로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서해남부지역에서 서울쪽으로 진입하려면 반드시 풍도 앞바다를 거쳐야 했고 이와같은 이유로 풍도 인근에는 이양선(異樣船)이 자주 출몰하였다. 1894년 7월 일본은 이 풍도해전 승리를 통해 서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평택․ 성환 전투와 평양전투 승리를 통해 청군을 몰아냈고 그 후 러일전쟁 때에도 풍도를 발판으로 서해안을 거슬러 인천항과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였다.
화성궁평항으로 접안
답사팀은 풍도를 뒤로하고 배로 화성 궁평항에 접안, 다시 버스로 화옹방조제와 남양방조제를 건너 서해 경기만의 끄트머리인 아산만 방조제에 이르렀다.
일본의 풍도해전의 기세는 이곳 아산만을 거슬러 당시 삼남대로등 내륙과 연안교통 중심지인 평택 안성천 지역에서 본격적인 싸움이 이루어진다. 조선말기 ‘素沙河’ 라 불리었던 안성천은 아산만으로 흐르고 하천주변에 많은 포구와 나루가 발달되어 현재 평택시 주변까지 물길이 형성되어있었다.
아산만에서의 설명
1894년 7월28일 저녁 청․일양군은 ‘소사벌’과 지금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는 성환 부근의 ‘홍경평’에서 격돌하였다. 청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진압 등을 위해 안성천의 백석포와 평택의 군문포로 상륙 소사벌이 펼쳐져 있는 성환 지역에 진을 쳤고 소사천을 사이에 두고 일본군이 공략하여 압승을 하게 된다.
이 안성천은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 임진왜란의 전적지였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에게 패하여 한성과 한강유역을 빼앗긴 백제가 안성천과 소사벌을 중심으로 최후의 일전을 벌이다 물러낫고 임진왜란 때는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조․명연합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여 왜군을 무찌른 장소이기도 하다.
청군이 상륙했다는 평택 군문포
풍도와 성환 평택전투의 승리로 일본은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는데, 이는 청의 주력부대가 있었던 평양과 중국 위해의 북양함대 패퇴로 조선강점을 둘러싼 동아시아 전쟁의 파고가 휘몰아치게 된다.
하지만 청군이 상륙했다는 군문포나 청군의 망군대가 있었던 ‘만근다리’ 라 불리는 안성천 철교에서도 아무런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지명으로서만 군물포(軍物浦)가 ‘군문포’(軍門浦)로 불려 당시 청나라 주둔한 곳임을 짐작케 할 따름이다.
소사천을 사이두고 격전이 벌어진 소사벌
대동법 시행기념비에서 역사공부
격전이 이루어졌던 ‘소사벌’은 벼이삭이 막 패고 있는 푸른 들녘으로 평화롭기 한량없다. 참혹했던 전쟁이 주로 백성들이 몰려 살던 평택과 아산, 성환 이다보니 시대적 고통으로 남아 구전되고 있다. 열강의 침략과 행포가 극심해 어디 하소연 할 수 없는 답답함으로 하늘을 향해 탄식했던 말이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 였다 한다. 무너져 내린 나라에 의존할 수 없이 넋을 놓고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애환서린 안성천 주변의 평택인의 삶을 보는 듯했다.
격전지 '아교' 다리가 있는 곳
평택전쟁의 격전지 아교 다리옆, 어쩌면 당시 전장을 목격했을 거대한 버드나무 그늘에 모인 답사팀은 청․일전쟁의 먹구름이 장차 한반도 전역을 뒤덮고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충천하늘에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되물어봤다.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역사적으로 재생시키기 못한 잊어진 전쟁의 흔적과 상처들.. 청국과 일본국의 싸움 속에서 무수히 죽어간 주민들, 제대로 장사지내지도 못한 원혼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무덤이 되어버린 무심한 산천들. 지금의 경부선 철교 된 소사천의 ‘만근다리’를 바라다보면서 쉴틈 없이 지나다니는 상하행 기차소리가 마치 상여소리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만근다리 경부선 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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