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의 역사

[스크랩] 4월옛길답사기-"벛꽃이 흩날리는 4월, 안산충절의 단심(丹心)을 찾다".

박영희 2011. 5. 2. 18:35

「무릇 충신(忠臣) 열사(烈士)가 나라를 섬김은 국난(國亂)을 당했을 때

목숨을 바쳐 인(仁)을 이루는 데 있다. 하늘의 명 또한 위훈(偉勳)과 환업(煥業)으로써

그 자손을 반드시 창성하게 하니, ·····  

군자는 이로써 천리(天理)가 없다고 탄식하는 말을 함부로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목숨을 바쳐 인(仁)을 실천한 천지 이치와 도가 바로 이곳에 있다'고

김여물 장군을 칭송한 병자호란의 중신 김상헌 글이다.

 

사진1> 와동 사세충렬문에서 답사를 시작하며

 

물질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고 부정과 불의가 만연한 현대사회 속에 ’충절(忠節)‘의 가치는 뭘까?

천명(天命)에 따라 ’충절‘의 마음으로 자손은 창성할 수 있을까?

전통사회 최고의 덕목은 ‘인(仁)’이다. ‘인’은 사람본연 마음의 회복이고,

공자는 ‘인’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그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사회에 대한 공경,

나라에 대한 충성으로 철저히 현실적 삶 속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충효가 유교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폄하되는 측면도 있지만

인본적인 열정적 삶과 사랑의 발로는 아닐까.

그것이 의례히 몇몇 위인들과 영웅들 반열에 주어진 공적이었다면

예나 지금이나  별반 느낌이 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심’에서 이탈된 ‘2인자’들의 역경과 고난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부녀자들과

민중들이었다면 사뭇 다르다.

천지를 움직이는 지극한 정성과 삶의 진정성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안산은 또한 이러한 ‘2인자’들의 피 끓는 역정과 민초들의 항거정신들이 배어있는 땅이기도 하다.

 

사진2> 김여물 장군과 김류 신도비

 

김여물 장군은 신립장군의 부장으로 임진왜란 충주방어에 나섰던 충장이다.

김여물은 신립에게 새재의 고수를 주장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았고 마침내 왜적에게 새재를 내주고

말았다. 또 불리하면 중앙으로 가서 한양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으나 신립은 또 듣지 아니하였으니,

김여물은 미리 패할 것을 알았다.

아군이 패하자 신립이 김여물에게 묻기를, "공은 살기를 원하오" 하니

김여물은 웃으면서 "내 어찌 죽음을 아끼리오" 하고,

함께 탄금대(彈琴臺) 아래 이르러 적 수십 명을 맨손으로 죽이고 물에 투신하였다.

배수진의 대명사가 된 탄금대에서 임진왜난 최대 통한의 인물이 된 김여물 장군,

그 넘치는 충의기에 장렬함과 가슴 선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진3> 광덕산 자락의 김여물 장군의 묘역에서

 

김여물 장군의 정신혼이 대대로 이어진 것일까.

아들 김유는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영의정으로 병자호란을 맞게 되고 이때 사세고부가 오랑캐에

욕을 당하느니 죽는 편이 옳다하여 강화도 바다에 몸을 던졌으니 김여물의 후실인 평산 신씨,

며느리 진주 유씨, 손자 며느리 고령 박씨, 증손자 며느리 진주 정씨이다.

현 와동 '세충렬문' 김여물 장군의 애국충성과 4대에 걸친 고부(姑婦)의 열녀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정문(旌門: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집 앞에 세운 붉은 문)내린 것이다.

 

사진4> 충비 갑이의 정려

 

충절은 사대부들만의 위업은 아니었다. 문화유씨(文化柳氏) 4정문은 충,효,열녀와 함께

충비의 정문이 있다. '충'은 조선 중기의 명신 충숙공 유관으로 모함으로 죽음을 당하고,

 ‘효’는 유관의 아들 유광찬, ‘열녀’는 유광찬의 부인 신씨, ‘충비’는 여종 갑이의 충절을 기린 것이다.

유관의 여종 갑이는 주인를 무고했던 우의정 정순봉 집안의 노비로 들어가 전염병을 퍼뜨려

원수의 가족들을 몰살시키고, 스스로 순절하였다.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의 뼈를 구해다가 정순봉의 베개 속에 넣어 일을 도모했다는 것인데,

‘환타지’ 같은 얘기다.

현재 와동에는 충비 갑이 묘소가 주인 집안과 나란히 묻혀있다.

 

사진5> 화정동 오정각에 들어서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과 만고효행에 빛나는 곳이 화정동의 ‘오정각’과 ‘고송정’이다.

조선 세조때 단종복위 모의에 가담하여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참형을 당한 충의공 김문기의 충절과

그 아들 김현석의 충신정문, 손자 김충주, 증손 김경남, 현손 김약전의 효자정문이 각각 봉안되어

 ‘오정각(五旌閣)’이라 불린다.

전국에 이렇게 5대가 연이어진 충효(忠孝)의 정문(旌門)으로는 유일하다.

 

사진6> 오정각 뜰에 핀 민들레

 

김문기와 함께 아들 김현석은 영월군수에 재임 중 아버지와 같이 순절했다 하고,

손자인 김충주는 노비가 되어 가던 중에 삼수에서 이곳 화정동 너비곡 마하산에 숨어들었다.

스스로 ‘탄옹(炭翁)‘ 이란 호를 지어 숯을 굽고 살았던 김충주는 단종과 참혹하게 죽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생각하시고 원통한 나날을 보내고 밤낮으로 뜨거운 눈물을 소나무에 뿌리니

소나무가 말라 죽었다하여 후손들은 그곳에 ‘고송정(枯松亭)’을 지었다.

 

사진7> 너비곡 고송정에서

 

평생을 숨어 고행을 좌초했던 ‘탄옹공’의 유시(遺詩)를 보면, 삼수의 찬바람을 맞으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사리를 모으지만,

어지럽고 힘든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전해주는 것 같다.

 

두려워라 남은여생 갈 곳이 없어

날이 저무는 서산에서 고사리를 모으네

스무 내의 모진서리 구두에 떨어지고

삼수의 찬바람에 할미새가 나르네.

애끓는 나의 심정 피를 말로 토하고,

떠돌이 나의 신세 헤어진 베옷을 입었구나.

은근히 자손에게 말을 전하니,

충효(忠孝)로 서로 하여 어김없으리.

 

사진8>암각으로된 '탄옹고지' 표지석

 

‘탄옹고지‘ 암각글씨가 선명한 ’고송정‘을 등지고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망월암(望越岩)‘이란 바위가 있다.

그 바위는 탄옹이 매일 올라 단종능(莊陵)이 있는 영월 쪽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울던 곳이다.

증손 김경남은 지극효도로 어머니께 평생 버섯공양을 다해 ’효도버섯‘이라는 말이 나왔고,

현손인 김약전도 왜병(倭兵)들까지 100세 노모를 모시는 그의 효행에 감탄한 나머지 피난할 곳을

알려주면서 성씨(姓氏)를 보존케 해주었다 하여 이곳을 ’성지점(姓支店)‘이라 한단다.

물질과 욕망의 늪지에 허우적거리는 이 시대에 다들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 아닌가.

 

사진9>안산예절원에서 답사를 정리하며

 

눈 깜박할 새 온 산천에 만개한 벚꽃 잔치가 한창이다.

쉬이 피고 질 봄날의 서정은 흩날리는 꽃바람처럼 안따깝고 어지럽다.

 ‘화심(花心)’은 곧 ‘단심(丹心)’이 아니던가.

이 짧은 봄날, 탄금대의 원신이 된 김여물 장군의 기개,

소나무까지 녹였던 탄옹공의 충심으로 마음을 부여잡고

옛 충절의 도정에 이른 신발끈을 다시 매어본다.

출처 : 안산지역사연구모임
글쓴이 : 연안이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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